재벌가의 학맥(學脈) 지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 재벌가의 자녀들은 경기고, 경복고 등 서울 명문 사립고를 나와 서울대 등 명문대학을 거쳐 해외 MBA를 졸업한 후 경영수업을 받는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 역시 경복고를 나와 서울대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 미국 하버드대의 MBA를 거치며 경영자 수업과 함께 학맥을 다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찌감치 미국의 명문 사립고로 조기유학하는 재벌가 자제들이 늘고 있고 이미 국내에 명문 사립고 출신으로 구성된 탄탄한 학맥이 구축되고 있다.
재벌가 자녀들이 미국 명문 사립고를 찾는 이유는 글로벌 경영차원에서 해외 여러기업과 비즈니스를 할때 명문 사립고 인맥이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모 그룹 재벌 3세는 복잡한 절차를 밟지 않고 듀폰 회장과 직접 사업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미국 세인트폴스 스쿨 시절 클래스메이트 가운데 듀폰 집안의 자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벌 3세가 효성그룹의 조현준 부사장이며 화학사업이 주 분야였던 효성그룹은 덕분에 글로벌 화학기업인 듀폰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해외 명문 고등학교 인맥이 비즈니스에 큰 도움을 줬던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계금융의 중심인 뉴욕 월스트리트를 지배하는 주요인사 중 상당수가 명문 사립고와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했다.
◆글로벌 경영시대 해외 인맥 중요
이런 이유로 재벌가에선 자녀들을 일찌감치 미국 유명 사립고에 조기 유학하는 사례가 많다.
명문 보딩스쿨(사립 기숙학교)은 미국사회에서도 상류층만 입학할 수 있다. 이곳을 거쳐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성골 중의 성골로 분류된다. 미국내 명문 보딩스쿨은 유명 사립대보다도 더 입학하기 어렵다.
기숙사 비용을 포함한 연간 학비가 최고 4만달러(4000만원 선)를 육박하는 비싼 학비도 문턱이 높은 이유중 하나다.
돈만 있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년 입학생으로 소수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과거 유복한 백인 자녀의 엘리트 교육을 위해 생겨났으나 지금은 전 세계의 상류층 자녀들이 곳으로 몰려들면서 이들 학교는 정상급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장(場)으로 부상하게 됐다.
국내 여러 재벌가의 자제들은 특정 미국 명문 사립고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형제 혹은 부자지간이 고교 동문이 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학까지 동문일 경우도 있다.
현재 미국에서 열 손가락안에 드는 명문 보딩스쿨로는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필립스 아카데미(앤도버), 세인트폴스스쿨, 초우트 로즈메리 홀, 그로튼 스쿨, 디어필드 아카데미, 하치키스 스쿨, 콩코드 아카데미, 밀턴 아카데미, 로렌스빌 스쿨 등이 있다.
필립스 아카데미 출신은 김상지 전 동아일보 회장의 두 아들, 김병국 고려대 교수와 김병표 주원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두 형제는 나란히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하기도 했다. 이들 형제는 자녀들도 모두 필립스 아카데미에 진학시켰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의 김도우 공동대표도 필립스 아카데미 출신이다. 한국 출신 금융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람에 뽑힌다. 부친인 김동환 인도네시아 코린도 그룹 부회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들이 만약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인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왔다면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 온 인재들과 함께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자웅을 겨루면서 실력을 쌓았고 또한 이들과의 친분을 교류하면서 두터운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효성가 세인트폴스 출신 수두룩
영국 성공회가 1856년에 설립한 세인트폴스스쿨은 미국 뉴햄프셔주에 자리 잡고 있다. 전교생이 500여명으로 중간 규모이지만 캠퍼스가 고풍스러운 분위기여서 공부에 전념하는데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교사 당 학생수가 불과 5명으로 최저 수준을 자랑하고 아이비리그의 명문대학의 재정을 능가하는 대규모 학교 기금을 보유하고 있는 내실이 튼튼한 학교로 평가 받는다.
세인트폴스 출신으로는 2004년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세계적인 금융인 존 피어폰트 모건,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글로벌 화학기업인 듀폰 가문의 자녀들, 금융기업 펠론 가문 자녀들, 록펠러 가문 자녀들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효성그룹의 자녀들이 대표적인 세인트폴스 스쿨 출신들이다. 조석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부사장은 자신이 졸업한 세인트폴스 스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국내에서 입학설명회를 지원할 정도로 애정이 돈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효성은 지난 1987년부터 매년 국내에서 열리는 세인트폴스 설명회를 협찬하고 있다.
조 부사장은 세인트폴스를 거쳐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일본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하면서 세인트폴스의 위력을 느겼던 일화가 있다.
미쓰비시 상사의 벤 마키하라 회장이 당시 말단 직원이었던 조 부사장을 호출한 것. 영문도 모른 채 회장실로 들어간 조 부사장은 마키하라 회장이 바로 세인트폴스 동문인 것과 반가운 마음에 불렀다는 말을 듣게 된다.
사실 효성그룹은 세인트폴스와 인연이 깊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의 세 자녀도 모두 세인트폴스를 졸업했다. 조현준 부사장과 그의 사촌형제들이 모두 고교 동문이다.
세인트폴스 출신의 또 다른 재벌가 경영인으로는 김석동 잇츠티비 대표이자 전 굿모닝 증권 회장을 들 수 있다. 김석동 사장은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3남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김 사장은 세인트폴스를 졸업하고 브라운대를 나왔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동관씨와 차남 동원씨도 세인트폴스를 거쳐 각각 하버드 대와 예일 대에 진학했다.
초우트 로즈메리 홀은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외아들인 박재영씨가 다닌 곳으로 알려졌다. 150명의 교사진을 보유한 이 학교는 여학교 로즈메리홀과 남학교 초우트 스쿨이 병합된 탄생했다.
국내에는 초우트 로즈메리 홀의 동문회가 지난 2004년에 결성됐으며 20여명의 동문들이 활동하고 있는 데 이 가운데는 홍정욱 해럴드 경제 사장도 포함돼 있다. 동문들의 상당수가 글로벌 컨설팅 기업이나 금융기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장남인 최제욱씨도 초우트를 졸업하고 예일대를 거쳐 대학원을 준비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