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고 파직되어 유배 간 무오사화 때 ‘용학주소(庸學註疏)’ 등 그의 저서는 부인이 태워 없앴다. 그가 죽은 뒤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오늘은 그가 숨을 거둔 날. 1450~1504.
☆ 고사성어 / 등화가친(燈火可親)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학문을 탐구하기에 좋다는 뜻이다. 자식...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 그는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그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했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오늘 숨을 거뒀다. 1454~1504.
☆ 고사성어 / 소은행괴(素隱行怪)
‘상리(常理)를 벗어난 해괴한 주장을 하고...
이로써 무오사화의 서막이 올랐고, 왕실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을 작성한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에게 반역죄를 부여했고, 김일손의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려고 했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홍길동(윤균상 분)은 이번 반역 세력에 충원군(김정태 분)을 엮으려 했다.
홍길동은 이종수에게 접근해 "세조대왕에 대한 말을 충원군에게 듣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기회 삼아 사림들의 목숨을 쓸어 담았던 무오사화를 통해 자신의 반대파를 축출하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어미 폐비 윤 씨의 죽음에 관계된 자들을 부관능지(시신이 든 관을 쪼개 사지를 찢어버리는 극형), 부관참시(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극형)하여 조선왕조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된다.
영화의 첫...
그러나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후일 무오사화의 빌미가 됐다. 사관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글을 사초에 수록한 것이 조선조 최초의 사화를 불러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지는 등 많은 제자들이 죽었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돼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열일곱 살 때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 땅에 유배된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한 그는 34세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됐을 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언로(言路)를 막은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파직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도학이념에 따른 개혁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그는 사림파의 경제적 토대인 향촌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주자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궁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다.
연산은 성품이 포악하고 살피기를 좋아하여 정치를 가혹하게 하였다. 주색(酒色)에 빠져 사사(祀事)를 폐하고 쫓겨난 어미[出母]16) 를 추숭(追崇)하면서 대신(大臣)을 많이 죽였으며, 규간(規諫)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였으며, 서모(庶母)를 장살(杖殺)하고 여러 아우들을 찬극(竄殛)...
연산군은 왕위 당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와 어머니 폐비윤씨(尹氏)와 관련한 갑자사화로 피의 숙청을 일으켰다. 연산군은 또 여자와 사치, 향락에 빠져 국정을 등한시 했고 광기어린 행동을 보이며 스스로를 파괴하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병으로 죽었다.
영화 ‘간신’은 연산군 11년, 1만 미녀를 바쳐 왕을 쥐락펴락했던 희대의...
물론 연산군처럼 사초를 농단하여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잇달아 일으키고 비행을 일삼다가 권좌에서 쫓겨나 역설적 교훈이 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현행 대통령기록물에 관한 법에는 이런 역사적 전통과 지혜, 그리고 교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임자가 남긴 여러 문서를 국정 운영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되, 정략적 이용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문서를 분류하여...
"탈법·초법적 회의록 공개를 강행한 새누리당과 국정원을 보니 훈구파의 사주로 인한 연산군의 사초(史草) 강제 열람이 생각난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 2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혹 공개를 조선시대 무오사화로 비유하면서.
"국정원은 막강한 조직·정보력을 이용, 대선에 개입해 여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