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22대 국무총리에 취임했지만, 명지대 학생 강경대 씨가 시위 진압 중 무차별 폭행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4개월 만인 같은 해 5월 사의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후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주자유당에서 당무위원과 고문으로 활동했다. 명지대 교양교수와 서울디지털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지연월(88) 씨, 딸 모라(62) 씨, 아들 진(57)...
고인은 1991년 강의 도중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가 학생들의 반발이 일자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해 새 정치를 주장하는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한때 대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92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했으며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
이후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둔 고인은 1991년 강의 도중 강경대 치사사건을 비하하는 언급을 했다가 학생들 반발에 강단을 떠났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4년 신민당을 창당하고 이듬해 고 김종필 전 총리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했다....
서울 서부지청장 재임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 군 치사사건을 담당했다. 공직 생활을 마친 뒤에는 한양대 객원교수와 한국외국어대 법과대학 석좌교수, 대한민국을생각하는호남미래포럼 이사장 등을 지냈다.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 19호실, 발인은 26일 오전 6시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화순 씨, 자녀 김남은(GS칼텍스 지속경영실 부장)ㆍ김수란ㆍ김수영 씨 등이...
윤상원, 전태일, 강경대, 김귀정 등 국가 권력의 야만적인 폭력 앞에 무참히 스러져간 청춘 열사들이 불쑥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열사를 비롯해 수많은 열사가 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던 이준·이상설·이위종 열사, 박열 열사, 유관순 열사, 김마리아 열사 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명지대 강경대 군 사건으로 촉발된 대학가 시위로 대학교정은 1년 내내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강군의 시신을 부여안고 울부짖는 아버지의 통곡은 수많은 아버지의 가슴을 할퀴었다. 1991년이다.
대학가 시위로 얼룩졌던 1991년 연말 한해를 결산하는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연세대 교정에 들어서던 순간, 한 학생이 “아버지, 빨리...
하지만 같은해 5월23일 이른바 강경대 사망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20일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김영삼 정부시절인 1993년 12월17일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회창 전 총리 역시 단명한 경우다. 이회창 전 총리는 재임 후 125일만인 1994년 4월21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불화로 전격 교체된 바 있다. 2000년 1월1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 박태준 전 총리는 부동산 명의 신탁...
당시 노태우 정권은 명지대 1학년생이던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자 이를 무마할 국면전환용 사건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1991년 5월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한 뒤 투신해 숨지자 그 배후로 강 씨를 지목, 국과수 필적 분석 결과를 내세우며 강 씨를 구속기소했다.
법원도 '유서의 필적은 김 씨가 아닌 강 씨의 것;이라는...
경찰은 현재 전체 최루액 보유량 1만318ℓ 중 44%인 4528ℓ를 CS최루액 형태로, 나머지를 신형인 파바 등으로 보유 중이다.
이로써 CS최루액은 최소 31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1991년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에 따른 집회 등 대규모 시위에서 경찰은 물포에 섞은 최루액을 활용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