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으로 충선왕은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폐위 당했으며, 다시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이후 공주는 충선왕과 함께 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왕과 공주의 사이는 이미 회복 불능이었다. 충선왕은 충렬왕에 대한 반격을 생각했고, 충렬왕은 공주를 미남인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改嫁)시켜 충선왕의 부마로서의 지위를 박탈해 버리고자 하였다.
1301년...
아버지 이귀와 시아주버니 김자점은 서인세력을 규합해 광해군의 폐위를 도모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눈치 채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자, 이예순은 광해군의 측근인 상궁 김개시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김개시는 이예순의 부탁을 받은 직후 광해군에게 충신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잘못된 조언을 던졌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 등에 대한 처벌을...
그런데 용수는 폐위당한 진지왕의 아들이었다. 진지왕의 폐위 후 진평왕이 왕이 되었으므로 용수는 자칫하면 정적(政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용수는 진평왕 대에 오히려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최측근에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선덕왕대에도 지방 순찰을 다니고, 황룡사 9층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활약을 보이고 있다. 천명부인이 두 집안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진지왕은 575년에 즉위한 지 4년 만에 정치가 문란해졌고, 음란함에 빠져 폐위된 왕이다. 도화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욕심을 내었는데, 이때가 진지왕 4년의 일이었다. 진지왕은 도화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에 도화녀가 단호히 거절하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남편이 있는데, 어찌 남에게...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에 충선왕이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파직되었다가 1307년 복직하였다. 1308년 충선왕 복위로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지고, 1321년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씨 부인은 정치적 격변기에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삼가고 신중하였다. 남편이 집에 온 손님을...
그녀의 할아버지 명종은 1170년 무신란으로 정중부 등 무인들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1197년 최충헌에 의해 폐위 당했다. 아버지 강종은 명종이 폐위될 때 강화도로 내쫓겨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60세인 1211년에야 다시 최충헌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 사이 최충헌은 신종과 희종 두 명의 왕을 더 갈아치웠다.
이런 무시무시한 최충헌, 그녀 가족의 원수라고도 할 수...
2일 밤 방송되는 KBS2TV 수목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폐위된 연산군(이동건 분)이 유배를 떠나는 모습이 전파를 탄다.
채경(박민영 분)은 새로운 중전이 되지만, 몰살 당한 친정 부모와 폐위된 고모 때문에 중종(연우진 분)에 대한 원망을 키워간다.
이 와중 연산군은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채 유배지로 향하고, 같은 시각 채경은 짐을 싸서 사저로 향하며...
진성대군은 연산군(이동건 분)을 폐위하기 위해 궁을 급습하고, 연산군은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라고 진성대군을 도발한다. 이와 함께 연산군이 묘령의 여인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냈다.
진성대군은 불안해하는 채경에게 "우린 이제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채경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영상...
중종반정과 함께 폐위되어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 후에 영조 때 단경왕후로 추증되었다.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발생하였을 때 아버지 신수근이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이 끝난 후 중종은 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박원종 등 반정 주모자들이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그러나 효종은 옹주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귀인 조씨만 자결하게 했다. 조 소용을 폐위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총애했던 사실을 감안하여 자진(自盡)케 하고 작호를 폐하지 않은 채 1품 귀인에 맞게 예장(禮葬)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한편 고보결은 15일 방송된 '7일의 왕비'에서 연우진의 첫사랑 박민영에 본격적으로 칼날을 세우며, 박민영이 보는 앞에서 연우진에게 진한 입맞춤을 해 눈길을 끌었다.
'7일의 왕비'는 박민영이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폐위되는 설정으로, 고보결이 훗날 박민영을 대신해 새로운 왕비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단경왕후는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의 비로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지만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된다.
이에 고보결이 연기하는 윤명혜가 단경왕후에 이어 중종의 계비가 되는 장경왕후가 되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장경왕후는 1507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515년 세자(훗날 인종)를 낳은 뒤...
경창궁주가 왕을 저주하였다는 무고(誣告)에 걸려 폐위당하고 서민이 된 것이다. 일의 전말은 이러하다. 왕종은 평소에 병이 많았다. 궁주는 장님인 승려 종동(終同)을 불러 액을 물리칠 방법을 묻고는 기도를 한 후 그 음식을 땅에 묻었다. 환관인 양선(梁善), 대수장(大守莊) 등이 “경창궁주가 아들 왕종과 더불어 임금을 저주하며,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연산군은 폐위되기 며칠 전 후궁 장녹수와 전전비(田田非) 등과 함께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날따라 울적했는지 시를 짓고 눈물을 흘렸다. 장녹수와 전전비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연산군이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뜻하지 않은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생기면 너희들도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고 우려했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1506년...
강종은 1170년 최충헌(崔忠獻)이 의종을 폐위하고 옹립한 명종의 맏아들이다. 1173년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무신란의 주역이었던 이의방(李義方)이 1174년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넣었다. 이 여성이 사평왕후(思平王后)로, 같은 해 이의방이 살해되면서 그녀 역시 폐비되었다. 이에 1175년 원덕태후가 두 번째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명종은 비록 실권이 없는 왕이기는...
신종은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다섯째 아들로, 인종 사후 큰 형인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무신란으로 의종이 폐위되자 셋째 형(명종)이 즉위하였다. 1197년(명종 27)에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즉위시켰다.
즉 선정태후는 애초에 태자비로 간택된 것이 아니고, 그저 ‘왕자의 부인’이었을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변동에 의해 왕비가...
두 왕후가 언제 죽었는지, 혹은 의종이 폐위될 때까지 살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무비는 이들에 못지않은 위세와 조정 내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환관 백선연이었다. 백선연은 남경의 관노 출신으로 의종이 남경에 갔을 때 보고 데려와 ‘양자(養子)’라 부르며 총애했다. 같은 남경 출신에 신분도 같았으니 드넓은 궁에서 둘 간의...
의종은 폐위되어 태자와 함께 각각 거제와 진도로 추방되었다. 비록 그녀의 셋째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기는 했지만 권력은 무신들의 손에 있었다. 1173년에는 의종이 이의민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되었다. 1174년에는 이의방이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182년에 넷째아들 충희가 죽었는데 태후는 무신들이 죽인 것으로 짐작하고 속을...
다만 그때는 ‘파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폐위(廢位)’라는 말을 사용했다.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중종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명의로 발표한 글, 즉 오늘날로 치자면 주문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사람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대군을 사저에서 맞아...
현덕왕후는 단종 폐위 후 그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중종 때 복위되었다.
조선 초기 후궁에서 세자빈이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처첩 구분은 민감한 문제였고 또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올라간 것은 딸을 낳았다는 것 외에 시아버지 세종으로부터 남다른 신뢰를 확보했기 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