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김병조가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했던 “민정당(당시 여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 통일 민주당(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는 발언의 파장은 역대 말실수 중 가장 강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국민의 뇌리에 각인돼있다.
이외에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자타공인 의형제급의 친분을 자랑하는 가수 김흥국을 필두로 이덕화, 강신성일, 정한용...
지난 26일 비대위 전체회의 직후 브리핑 당시 "당명과 함께 당 색깔도 바뀌느냐"는 질문에 "고려 중"이라고 밝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총선 당시의 민주정의당(민정당) 시절부터 민주자유당(민자당), 신한국당을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당명을 바꾸면서도 파란색만은 고수해왔다.
그는 “민정당 11대와 12대, 민자당 14대, 이후 동화은행사건으로 징역형 선고받아 의원직 상실하고 열린우리당으로 17대 비례대표 의원한 대한민국 최고의 철새, 비리표본에다가 최근엔 안철수 멘토”라면서 “기가 막히다”고 했다.
이어 “김 위원은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의 조카사위”라고 부연했다....
국회 새 사무총장(장관급)에 박희태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원중(66)씨가 29일 임명됐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어 윤 총장 내정자에 대한 임명승인안을 통과시켰다.
윤 신임 총장은 연세대를 졸업한 뒤 민정당·민자당 당직자로 활동한 이후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거쳐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어 "뇌물로 인해 의원직을 그 당시 상실하신 분이 쇄신해도 될거면, 국보위부터 시작해서 민정당, 민자당, 새천년 민주당의 비례대표까지 안 가보신 당이 없고 마지막에 한나라당에 왔다"라며 "이런 분에게 한나라당 쇄신을 맡겨도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전 의원은 특히 "(김종인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비서실장을 지냈던...
투표일을 불과 10여일 앞둔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등 3명의 후보가 ‘3파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투표를 2개월 앞두고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했다....
(하단 장례위원회 명단 참조)
박 전 의장은 고인과 함께 1980년대 민정당, 1990년대 자민련에서 의정생활을 함께 했던 인물이다. 황 전 회장은 고인이 포스코 초대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고인의 뒤를 이어 포스코의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정 회장은 현재 포스코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점을 들어 장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유족 측 대변인인 김명전...
이후 1990년 민정당 대표를 비롯해 13~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박태준은 마침내 국민의 정부시절이었던 2000년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그러나 부동산투자와 관련된 잡음이 이어지면서 4개월여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건강도 이때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2001년. 74세의 은퇴 정치인 박태준은 미국으로 건너가 폐질환...
박 명예회장이 정계에 본격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이어 13∼15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옛 민주정의당 당대표위원, 옛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 등을 거쳤다.
포항제철 회장을 유지하면서 박...
4선(11, 13∼15대) 국회의원에 구 민정당 대표위원, 구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 등 화려한 정치적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인물로 일제시대부터 6ㆍ25전쟁, 경제성장, 민주화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군인이자 정치가, 리더였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육사 6기 출신으로...
충북 청원 출신인 고인은 육사 14기 출신으로 1981년 제 11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고인은 특히 5공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내무차관으로 보필하며 신임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86년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됐다.
1992년에는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4대 대선 당시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에...
그는 “5공화국 시절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당 운영비는 사무총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령해서 집행했다”며 “내가 국정을 책임진 후에도 이런 관례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 이후 기업인들 면담 신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면담이 끝날 때쯤 그들은 ‘통치 자금에 써달라’며 봉투를 내놓곤 했고 기업인이 자리를 뜨면 바로 이현우...
◇'펜트하우스'에서 '야전 사령관으로' = 대우조선 파업은 지난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노사분규중 하나다.
당시 근로자들의 분배 욕구가 늘어난 데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분규 현장 가세 등 노동운동에 정치 투쟁까지 가미됐던 분위기는 현재의 한진중공업 파업사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며 1988년 민정당 청년봉사단장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민자당 대변인과 총재 비서실장, 신한국당 원내총무와 이회창 대통령후보 정치특보 등을 거쳐 한나라당 부총재와 원내대표를 지냈고, 지난 17대 대선에서 당대표를 역임하는 등 모든 주요당직을 섭렵했다.
4월 재보선에서 당 지도부는 분당을에 전략공천을 추진하려...
국회의원으로는 1971년 8대 국회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을 시작으로 9~10대 국회에서 신민당 경북 문경.예천 지역구 의원, 11~12대 국회에서는 민주정의당 경북 문경시.예천군 지역구 국회의원, 제13대 국회에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국회에 진출하기 전에 영남일보 논설위원(1950년)과 명지대 교수(1961년)를...
한나라당 전신인 민정당과 민자당 대변인을 역임했고,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 대표를 지내는 등 주요 당직을 두루 섭렵했다.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참패로 여당이 힘을 잃은 가운데 대화와 타협에 능숙한 그가 하반기 국정운영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한나라당 전신인 민정당과 민자당 대변인을 역임했고,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 대표를 지내는 등 주요 당직을 두루 섭렵했다.
하지만 그는 18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지 못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2008년 7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돼 재기에 성공했고, 2009년 10월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 재입성했다....
또 한 측근은 박병권 후보가 대학교 2학년 시절인 1985년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사건 때 농성에 참가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두 후보의 가족관계다. 박춘희 후보는 현재 국민권익위원회 사무처장인 박인제 변호사의 여동생이다.
박병권 후보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다. 김 전 대통령 친동생인 김대의씨 딸과 결혼해 슬하에...
그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불거진 민주화의 열기속에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직선제를 갈구하던 6월 항쟁끝에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선 후보자는 6.29선언을 통해 민의를 결국 수용했다.
김 전 대통령도 결국 사면에 따라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