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는 태후가 “최충헌이 왕을 폐립하였을 때 갖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으나 오직 근신하며 스스로 지조를 지켰다”고 되어 있다. 또 그녀가 천성적으로 곧고 밝은 품성을 가지고 있으며, 유순하고 고요한 행동은 스승의 교훈이 필요 없었고, 어려서부터 여공(女功·길쌈)에 힘을 썼다는 등 품성과 덕에 대한 칭찬이 많다. 태후는 1222년 사망했다. 능을...
당시는 고려의 전성기로, 고려인 스스로가 고려왕을 ‘천자’라 칭하며, 중국 황제와 동격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보름달 같다’는 표현에서 달처럼 환했을 그녀의 외모가 그려진다. ‘고려사 공주전’ 및 그녀의 묘지명에 따르면, 복녕궁주는 성격이 온순하여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또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부지런하며 부처님을 잘 섬겼다고도 한다....
고려사에 보면 인종의 혼인식 날 ‘폭풍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뿌리째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자겸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의례상 등급을 황태자와 동급으로 놓고,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여 황제에게나 붙이는 ‘절’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왕은 몇몇 신료들과 이자겸 제거에 나섰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모의에...
고려사에 보면, 태후는 성질이 유순하고 선량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병석에 눕자 왕이 친히 약을 조제하였으며, 죽으니 여러 차례 통곡하여 신하들로부터 예가 지나치다는 간언을 듣기도 하였다. 시호를 순덕왕후(順德王后)라고 하고, 수릉(綏陵)에 안장하였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하였으며...
예종은 효도가 지극했다 하며, 고려사를 보면 간혹 태후를 ‘조견(朝見)’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朝)’는 신하가 국왕이나 황제를 뵐 때에 한정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원(元) 간섭기에 충렬왕 부처가 원의 황태후를 만날 때조차 ‘조견’이 아닌 ‘알현’이라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태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태후는 1112년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태후의 섭정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임조칭제(臨朝稱制)’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태후가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고, 태후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에 해당하는 ‘제(制)’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조정에서 태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095년 7월 이자의(李資義)의 난이 일어났다. 이자의는 이자연의 손자로...
고려사에 보면 목종이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 어려서부터 임금의 도량이 있었지만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여 정무에 유의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또 남색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나오니 부부간의 금실이 좋았을 것 같지도 않다.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다.
목종에게는 그녀 외에 후궁이 한 명 있었다. 요석택(邀石宅)에 거주하는 궁인...
고려사를 보면, 최소한 헌정왕후의 정인(情人)인 안종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대량원군 역시 왕위에 뜻이 있었음은 삼각산 신혈사에서 중으로 있을 때 읊었다는 다음의 시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약포(藥圃)에 도사리고 앉은 작고 작은 저 배암/온몸에 붉은 무늬 찬란히 번쩍이네!/언제나 꽃밭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하루아침 용 되기란 어렵지...
고려사에는 노비안검법이 실시되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많았으며, 윗사람을 무시하는 기풍이 성행하여 사람들이 다 원망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왕후가 간절히 왕에게 간하였으나 광종이 듣지 않았다 한다.
왜 왕후는 광종의 정책을 저지하고자 하였을까? 일단 대목왕후의 외가가 대표적 호족세력인 황주 황보씨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왕비가 친족의 몰락을...
고려사에 기록된 김부의 지위는 나쁘지 않았다. 태조는 김부를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지어주고, 녹봉 1000섬을 주었으며, 신라를 경주라 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신란궁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신령스러운 난새의 궁’이란 뜻으로 자국을 버리고 타국에 와서 사는 경순왕을 난새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고려사에는 광주원군이 그 후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른다고 기록돼 있어, 왕규의 제거 뒤 왕자도 살해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소광주원부인 역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을까? 아들을 옥좌에 앉히고 싶었을까? 역사는 말이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헛된 욕망에 희생된 비극의 여인 혹은 잘못된 것을 탐한 욕망의 여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고려조 이전의 기록을 보면 해녀들의 채취물인 진주나 전복 등 조공과 관련된 자료가 있어 최대 1000년 이상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보성 뻘배어업은 보성 벌교 갯벌이 밟으면 매우 깊게 빠지는 특성 때문에 뻘배가 유일한 어업활동 이동수단이다. 뻘배로 꼬막 등 수산물을 채취한다. 고려사에 ‘강요주’라고 기록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한반도 남해안...
‘고려사’에는 왕후의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없지만, 우리는 행간에서 그녀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장화왕후는 태조에게 나주라는 지역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견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였다. 또 그녀 집안의 경제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녀는 고려의 건국을 연 또 한 명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나주시에는...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지리산 천왕이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 하였다. 김종직은 지리산을 기행하며 고려 사람들이 선도산 성모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하려고 이런 말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김일손은 지리산 기행문에 “천왕봉 꼭대기 성모사의 흰 옷을 입은 석상이 누군지 잘 알 순 없으나 어떤 이들이 고려 태조의 어머니라 한다....
◇오성취귀로 고구려의 천문 과시 = 고려의 오성결집 기록은 ‘고려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조선시대 김종서와 정인지가 편찬한 역사책이다. 정확히 ‘오성’을 언급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오성결집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발견됐다.
즉 서기 1108년(예종 3년), 1226년(고종 13년), 1327년(충숙왕 14년) 기록들인데 모두 오성결집이 1년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고려사 예지에는 숙종 7년(1102) 예부(禮部)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도, 사전(祀典:제사 규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24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허난성에 묻혔다는 기자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교육시설로는 길원초, 길음초·중, 미아초, 송덕초, 고려사대부속고, 서경대, 국민대, 경희대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청약일정은 5월 3일 1순위, 4일 2순위 접수를 진행하고, 당첨자는 13일 발표한다. 계약은 18일~20일까지 진행하며 입주는 2019년 1월 예정이다.
◇부산 사하구 괴정동 ‘괴정푸르지오’ = 대우건설은 부산 사하구 괴정동 950-2번지에 들어서는...
교육시설로는 길원초, 길음초중, 미아초, 송덕초, 고려사대부속고, 서경대, 국민대, 경희대학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모델하우스는 29일 오픈 예정이다.
한양은 경기 수원시 호매실지구 C-3블록에 ‘한양수자인호매실’을 분양한다. 지하 2층~지상 25층, 15개 동, 전용 84~97㎡, 총 1394가구로 구성된다. 내달 수원~광명고속도로가 개통되며, 수원...
'육룡이 나르샤'에서 척사광은 '척준경 곡산검법의 마지막 전수자'이며 척준경은 고려사는 물론 우리 민족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최강의 무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한편,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의 기틀을 세운 철혈 군주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 스토리를 다룬 팩션 사극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매주 월, 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