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전 사업 실패로 파산 위기에 내몰린 일본 도시바가 세계 반도체 시장의 뜨거운 감자였던 메모리 사업을 미국 브로드컴에 매각할 것이라는 관측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는 일본 반도체 산업계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NAND형 플래시 메모리 부문 세계 1위인 삼성전자의 벽을 끝내 넘지 못한 도시바의 씁쓸한 퇴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일본 경제 주간지 도요게이자이는 전했다.
한 매체는 8일(현지시간)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도시바가 오는 15일 이사회를 열어 우선 협상 대상자를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소식통은 유력 인수 후보로 미국 반도체회사 브로드컴과 사모펀드 실버레이크 연합, 도시바와 합작관계에 있는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일본 정부계 은행 연합 두 진영을 꼽았다.
도시바는 세계 2위 NAND 칩 생산업체이지만 파산 보호를 신청한 미국 원전 자회사 웨스팅하우스(WH)의 대규모 손실로 인한 구멍을 메꾸고자 핵심인 반도체 사업을 분리해 매각을 추진해왔다. 지난달 19일 마감한 2차 입찰에는 SK하이닉스와 미국계 헤지펀드 베인캐피털 연합, 사모펀드 KKR 등 미일 연합, 브로드컴과 실버레이크 연합, 대만 혼하이정밀공업과 샤프 등 4개 진영이 응찰했다. 여기다 욧카이치공장을 합작 운영하는 WD가 매각을 반대하며 별도로 인수를 타진해왔다.
도시바는 이들 5개 진영 중 브로드컴을 유력 인수 후보로 놓고 막판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드컴은 인수액으로 2조2000억 엔을 써내 금액면에서 호감을 준데다 도시바와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어 독점금지법 관련 심사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계 기업으로의 기술 유출을 경계하는 일본 정부의 우려도 덜 수 있다.
보도대로라면 수 개월간 세계 반도체 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도시바 반도체 인수전이 이달 중순이면 막을 내리는 셈이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전 세계 반도 시황이 모처럼 활황을 보이는 와중에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락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씁쓸해하고 있다. 일본 경제 주간지 도요게이자이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1980년대 후반엔 세계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지만 이후 30년간 지속적으로 점유율과 추진력을 잃고 업계에서 존재감이 거의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 중 도시바 반도체는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지만 일본 기업들이 인수에 손사레를 치면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입지는 더 좁아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도시바는 저장 매체로 사용되는 NAND형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인자다. IT 전문 시장조사업체인 IHS마르키트에 따르면 NAND형 플래시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6.1%로 압도적 1위이며, 도시바는 2위여도 점유율(17.4%)이 삼성전자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3위은 WD의 점유율(15.7%)을 합쳐도 삼성전자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대량의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AI) 보급과 클라우드형 서비스가 확대하면서 앞으로 데이터센터와 서버 및 스토리지 시장이 유망해보이지만, 이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를 추월하긴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해당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이지만 성장에는 증산 투자가 불가피한데, 설비 투자 면에서 도시바는 삼성전자에 비해 새발의 피다. 영국 반도체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액은 2016년 113억 달러(약 13조 원)였다. 반면 도시바는 18억4000만 달러(약 2조 원), WD는 17억5000만 달러에 그쳤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에는 NAND 외에도 DRAM 및 프로세서도 있기 때문에 113억 달러가 전부 NAND에 투입되는 건 아니지만 전체 액수의 3분의 1만 NAND에 투자한다고 해도 도시바나 WD는 따라올 수 없는 규모다. 게다가 올해 삼성전자의 투자액은 전년 대비 11% 증가한 125억 달러로 예상된다. 전년보다 3% 늘린 도시바나 WD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설비투자 격차는 미래의 생산력과 직결되고, 생산력 확대는 시장 점유율 확대로 이어진다.
연구·개발(R&D) 투자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3차원 NAND라는 대용량 제품의 양산화에서 도시바를 앞서고 있다. R&D 투자는 기업마다 산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설비투자처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도시바는 R&D 개발에 대한 투자에서도 삼성전자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바는 이러한 성장을 위한 투자 규모는 연간 약 4000억 엔 정도가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건 재무건전성 확보다.
여기다 삼성전자는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설비와 R&D 투자에 공격적인데다 고객사와의 협력관계도 순조롭게 구축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부문은 도요게이자이의 취재에 대해 “글로벌 기업과의 지속적인 기술 협력을 통해 서버와 같은 법인용 시장에서 고성능 SSD의 채용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은 구체적인 기업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2015년 5월 미국 구글과 3차원 NAND를 사용한 SSD 공급 제휴를 맺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 매각이 장기화하면 이득을 보는 건 인수업체가 아니라 삼성전자라고 도요게이자이는 지적했다. 어차피 설비와 R&D 투자에서 밀리는 한 도시바는 영원한 2인자 신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