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의 영의정 이양원(李陽元, 1526~1592)이 쓴 시에 나온다. “높으나 높은 나무에 날 권하여 올려두고/ 이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았으면/ 떨어져 죽기는 섧지 않아도 님 못 볼까 하노라.”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란 간 뒤 한양을 지켰던 그는 임금이 의주를 버리고 요동 땅으로 갔다는 소문이 들리자 임금이 나라를 버렸다는 수치심에 단식을 시작...
김한솔 PD는 2004년 시사교양 PD로 KBS에 입사한 이후 KBS1 ‘신역사스페셜’, KBS2 ‘추적 60분’, KBS1 ‘임진왜란 1592’ 등을 연출했다. 특히, 최근 성황리에 종영한 KBS2 ‘고려 거란 전쟁’의 공동 연출을 맡아 드라마 PD로서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드라마 방영 당시 공동 연출을 맡은 전우성 PD와의 불화설이 돌며 두 PD의 불화로 인해 ‘고려 거란...
최수종과 ‘임진왜란 1592’에서 호흡을 맞추며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한솔 PD가 특수 영상효과가 들어간 대규모 전투신을 완성시키며 볼거리를 압도했다.
32부작으로 기획된 ‘고려 거란 전쟁’은 현재 15회까지 방영됐다. 이에 일각에서는 완결된 작품 속 주인공에게 주는 것이 맞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으나 사실상 경쟁 상대가 없다는 평가다. 따라서 올해 KBS...
2016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1592’에선 최수종이 ‘용장 이순신’의 배턴을 이어받았는데요. ‘지장’의 모습 보다는 부하들을 열정적으로 독려하는 ‘용장’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기존 이미지와는 배치되는 부분이 있어 호불호는 있었으나 연기 자체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끌어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항상 함께 거론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됐지만,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됐죠. 패션쇼 주 무대가 될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자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알현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인데요. 경복궁에 입궐했을 때 근정문을 통해 들어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자 대한민국에서 궁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로 꼽히죠. 19세기...
삼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래읍성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전투가 치러졌던 역사적 공간이다.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성은 함락되었지만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국은 항전의 표상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 역시 다시 의병으로 들고일어났다. 그러한 항전의지는 300여 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따르면 1919년 3월...
1592년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치러가는 길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침입한다. 임진왜란이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이 무능한 관군 대신 적군을 격파하였으며 진주목사 김시민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 불리했던 전국을 전환시키며 휴전에 들어선다. 그러나 다시 발생한 정유재란은 임진왜란보다 더 큰 상처를...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순식간에 한양의 도성을 잃고 선조는 평양으로 거처를 옮긴다. 일본군은 당황한다. 성주는 성이 함락되면 자결을 하는 게 보통의 일본 전투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니 왕이 도망을?’ 경복궁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에게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다.
왜군은 조선을 정복하고 나아가 중국, 인도까지 손에...
한산대첩은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 60여 척이 73척 왜선과 맞선 전투다. 59척의 왜선을 격파했고 8000~9000명에 달하는 왜군을 수장시켰다. 그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개전 20여 일만인 5월 3일 수도 한양을 빼앗기며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조선의 전쟁 초기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는 승리였다. 실제, 한산에서 패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륙병진정책을...
한산해전은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는 51분 동안 몰아치는 해상 전투신으로 역대급 짜릿함을 선사한다. 관람객들 역시 웅장한 액션 스케일과 압도적 승리의 쾌감에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한산: 용의 출현’은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은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2년, 조선을 점령하고 명나라로 진군하려는 왜군에 맞선 이순신 장군(박해일)과 조선 해군이 활약하는 이야기다.
‘바다 위의 성’으로 불리는 학의 날개(학익진) 형태로 진용을 갖춘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의 복잡한 지형과 거센 물살을 이용해 왜군을 무찌른다.
김 감독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을 팔아서 흥행할...
이듬해 왜군의 침입(임진왜란 1592~1598)을 받았다. 그는 오늘 출생했다. 1552~1608.
☆ 고사성어 / 신체발부(身體髮膚)
효경(孝經)의 첫머리 개종명의(開宗明義)장에 실려 있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다. 우리의 몸뚱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 만큼 그것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효도의 첫걸음이라는 뜻.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았다.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이를 통해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3곳의 실록은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만 남게 됐다. 이마저도 풍전등화였다. 전쟁에 정신이 없던 시기, 정읍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은 사재를 들여 실록을 내장산 암자로 옮겨 지켜낼 수 있었다. 만약 분산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 초반, 조선군은 일본군에 크게 밀렸다. 특히 조선의 정예 북방 기마병이 충주 탄금대에서 무너진 것은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신을 가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조선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많은 연구자는 신립(申砬) 장군이 방어에 유리한 산악지형인 조령(鳥嶺, 문경새재)을 버리고 탄금대 일대의...
1592년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왔을 때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당시 재상을 지냈던 유성룡이 쓴 징비록과 서애집에는 명군을 지원하는 문제, 즉 일종의 방위비 분담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조정에서 명나라와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했던 유성룡이 명군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명군에게 제공할 군량미를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하는 대목이 곳곳에...
KBS의 ‘임진왜란 1592’가 올해 한국방송대상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방송협회는 ‘제44회 한국방송대상’ 대상작으로 ‘임진왜란 1592’를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관심을 모았던 가수상은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받았다.
올해 한국방송대상은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24인의 심사위원단(예심 15인, 본심 9인)이 지난 1년 간 지상파 방송을...
이에 김무열은 “최근 소맥을 말아서 줬는데 진짜 잘 마셨다. 진구가 말한 주량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한편 김무열과 여진구가 출연한 영화 ‘대립군’ 1592년 임진왜란, 임시조정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세자 ‘광해’와 생존을 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대립군’이 전쟁에 맞서는 이야기로 5월 31일 개봉한다.
계월향(桂月香·?~1592)은 평양 기생이다. 현재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만 남쪽에 논개가 있다면 북쪽에 계월향이 있다고 일컬어지면서 임진왜란의 2대 의기로 손꼽힌다. 만해 한용운이 ‘계월향에게’라는 시까지 남길 정도였으니 어느 시절에는 유명하던 여성임에 틀림없다.
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실린 계월향 이야기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의인왕후는 뒤로하고 총애하던 인빈(仁嬪) 김씨와 피란길을 떠났다. 선조가 개성에 다다르자 백성들은 임금님이 백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후궁을 귀하게 여기느냐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선조가 인빈과 피란길을 떠나는 바람에 의인왕후는 하는 수 없이 홀로 피란길에 올랐다. 의인왕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병을 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