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조선왕조실록, 역사를 지키다'에서는 태조부터 철종대까지의 472년간의 기록인 실록의 편찬과정을 오대산사고본 '성종실록',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3부 '조선왕조의궤, 왕조의 모범을 보이다'는 조선왕조의 행사 보고서인 조선왕조의궤의 편찬과 분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전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조선 성종(成宗)실록 6년 기사에도 나온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너는 면종하고 물러나서 후언하지 말라[汝無面從退有後言]’ 하였으니 신하가 임금이 있는 곳에 나와서는 모두 말하기를 ‘임금께서 하신 일은 모두 선합니다’ 하고는 물러나서 말할 때는 ‘선하지 않다’고 한다면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 시사상식 / 낙인효과(labeling...
국보 제151-1호에서 누락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성종실록' 7책은 '정족산사고본'인 제151-1호에 편입됐고,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효종실록' 1책은 국보 제151-3호 '오대산사고본'에 편입됐다.
특히 6.25 전쟁 때 북한군이 북으로 반출해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사고본 실록(4책)이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독대 금지를 제도화한 성종 이후 임금의 독대에 관한 기록은 단 세 차례뿐이다. 선조와 영의정 유영경의 독대(1607년), 효종과 이조판서 송시열의 기해독대(1659년), 숙종과 좌의정 이이명의 정유독대(1717년)만 기록돼 있다. 유영경과 이이명의 독대는 훗날 정쟁의 씨앗이 돼 결국 사약을 받고 죽는다. 송시열도 독대 이후 권력의 최고 정점에서...
성종실록에는 “광평대군의 부인이 큰 절을 (남편의) 묘소에 세웠는데,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에 금벽(金碧)이 빛나고 재(齋)를 닦고 경(經)을 읽기를 사시(四時)에 그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견성암은 견성사라 칭해졌다. 신씨의 대규모 불사는 조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조정 신료들은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은 묵살했다.
신씨가...
이 실록 기사는 안순왕후가 후궁에서 바로 왕비가 된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 죽은 장순왕후가 낳은 인성대군이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고, 혹은 장순왕후가 한명회의 딸이어서 그것을 의식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할아버지가 한명회인 인성대군의 존재는 왕실에서 그 의미가 특별했다는 것이다. 왕실이 새로운...
1395년(태조 4년) 4월 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교주도(交州道) 작목별감(斫木別監) 노상(盧湘)이 “벌채해 놓은 재목 1만여 개를 지금 곧 운반하려면 그 폐단이 매우 클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비 온 뒤에 뗏목을 만들어서 강으로 내려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린다. 재목 1만 개라면 엄청난 양이다.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1395년부터...
여기까지가 ‘성종실록’에 실린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다. 하지만 어우동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속내를 들춰보면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남편이 기생 연경비를 사랑한 나머지 어우동을 제멋대로 내친 것이었다. 1476년 종부시가 국왕에게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렸습니다” 하고 고발했다. 남편은 이 일로 고신(품계 또는...
1대 태조 왕건, 2대 혜종, 3대 정종, 4대 광종, 5대 경종, 6대 성종, 7대 목종까지는 존재 자체가 없다가 현종 때 갑자기 등장했다는 점이 왕건의 유훈일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린다.
셋째, 풍수 이치 면에서도 타당성이 없다는 점이다.
훈요십조는 고려 현종 1년 거란의 2차 침입(1010년)으로 당시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개경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이 화재로...
조선왕조실록성종 9년(1478) 11월 30일, 홍문관 부제학 성현(成俔) 등이 이런 상소를 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몸소 실천하는 돈독한 행실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효과를 체득하시고 밤낮 없이 노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가신다면 정일집중(精一執中)의 학문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伏願殿下躬踐履篤行之實 致修齊治平之效 勉强惕厲 進進不已...
그런데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실록에는 왕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까지 기록돼 있다.
성종 16년(1485), 시장 이전계획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언문으로 투서를 해 영의정 윤필상 등을 비난했다. 관리들의 잇속을 챙기는 조치라는 주장이었다. 7월 21일 기록에 의하면 윤필상은 울면서 자신을 면직해 달라고 했으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 기록의 말미에 ‘그 얼굴빛을...
“하늘이 뭇 백성을 내셨는데/내리신 명령이 믿을 수 없음은/처음이 있지 않은 건 없지만/능히 끝이 있는 것은 적기 때문이라네.”[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
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1539) 10월 2일의 기록에 ‘靡不有初 鮮克有終(미불유초 선극유종)’이 나온다. 시강관 이찬(李澯)이 석강(夕講)에 임문(臨文)해 이렇게 아뢰었다. 임문은 책을 펴놓고 읽는...
태종 6년(1406)에 시행된 개화령(改火令)은 성종 2년(1471)에 더 강화돼 궁궐의 병조(兵曹)에서 국화(國火)를 만들어 한성부로 내려 보내고, 고을마다 같은 방식으로 집마다 나누어주되 어기는 자는 벌을 주게 했다.
개화를 하는 날은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 매년 사시(四時)의 입절일(立節日)과 계하(季夏)의 토왕일(土旺日·입추 전 18일간)이다. 오늘이 바로 새로 불을...
성종실록에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한다"고 설명돼 있을만큼 경칩은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절기다.
또한 경칩은 예로부터 봄의 시작으로 많이 여겨졌다. 실제 경칩 즈음에는 겨울철 대륙성 고기압이 약화되고 이동성 고기압과 기압골이 주기적으로 통과하게 된다. 꽃샘추위와 따뜻한 기운이 반복되다가 점차 기온이 상승하며 본격적인...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다 현재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는데 악보는 정간보(井間譜)로 기보돼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40~145에 전하고 춤사위는 성종 때 간행된 '악학궤범(樂學軌範)' 권5에 전해지고 있다.
이날 공연은 연구소가 수행한 그간의 '봉래의' 관련 학술 및 연구 성과들의 영상발표를 시작으로 '봉래의' 창제에 담긴 왕의 심정을 독백 형식으로 간략히 표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