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영남 의원들과 지금 한동훈을 옹립하려고 하는 수도권 사람들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져서 제가 오죽하면 옛날 조선시대 때 서인 남인하고 싸웠던 서인이 패권을 쥔 다음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갈라져 있어요. 이준석이 당대표 될 때를 보면 이준석이 어떻게 됐습니까? 어쨌든 그 대통령...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명언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아라.”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다. 주자학의 대가인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해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뤘다.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해...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비판한 그의 사상은 소론 세력들에 의해 전승 발전되어 노론 일당 전제 체제 아래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오늘 숨졌다. 1629~1714.
☆ 고사성어 / 감택용서(闞澤傭書)
‘감택이 책을 빌려 베껴주면서 공부하다’라는 말.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스스로 공부해 성공한 사람이나 그런...
조 작가는 숙종의 진실한 사랑을 독점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지지한 노론 세력에 의해 악독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평가절하됐다고 주장한다. “대선 후보가 나올 때 지금의 여야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책에는 “그의 무덤은 ‘대빈묘’로 불렸고 사당은 ‘대빈궁’으로 불리는데 후궁의 지위 앞에 ‘대(大)’를 붙인...
유능한 인재라면 '반상'을 가리지 않고 썼고, 좋은 정책이면 벽파든 노론이든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고 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위기다"면서 "위기에는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고 국가가 가진 모든 지혜와 역량, 정책을 진영을 적재적소에 잘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 정치도 이제 바꿔야 한다. 거대 여야 두 당 중...
파평 윤씨 25세손인 그는 소론의 영수로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맞섰다. 블로거들은 윤증의 이런 면모를 윤 총장의 행적과 비교하고 있다. 윤 총장은 파평 윤씨 35세손이다.
어디 학연, 혈연뿐일까? 지연도 윤석열 대망론에서 빠질 수 없다. 윤 총장 본인은 서울 출생이지만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공주가 지역구인...
생후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돼 14세에 어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친아버지인 부왕의 어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27세에 아사(餓死)했다. 오늘이 그의 생일. 1735~1762.
☆ 고사성어 / 엄부자모(嚴父慈母)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 아버지는 자식을 엄하게 다루고,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보살펴야 함을...
하지만 은언군을 비호하려는 정조와, 은언군의 처벌을 통해 정조를 압박하려는 정순왕후 및 노론 벽파 신료들 간의 세력 다툼이 정조 집권기간 내내 진행되었다. 결국 남편 은언군 인은 강화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때 송 마리아는 며느리 신 마리아와 함께 폐궁에 외롭게 살고 있었으며, 슬픔을 잊고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 송 마리아는 며느리 신씨와 함께 천주교에...
그녀는 친자식이 없는 가운데 계비로서의 지위를 누리기 위하여 친정 가문의 소속 당파인 노론 벽파를 이용하였다. 결국 왕위 계승자였던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친정 가문을 통해서 개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순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내명부(內命婦)뿐만 아니라 정치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정조의 충실한 신하였던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그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그룹들과, 갑자기 왕권을 물려받은 재벌 회장들 간의 갈등은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정치판과 다를 바 없다. 갈등과 견제, 충성과 배신의 연속으로 공동이익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폐세자(廢世子) 되었다가 왕이 된다거나 귀양을 갔다가 다시 왕이 된 경우는...
그리고 조선시대 동인·서인과 남인·북인, 노론·소론식(式)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목소리로 나뉘었다.
그런 가운데 불과 얼마 전에는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지석 씨가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돌연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충격을 넘어 그나마 실낱처럼 이어져 있던 영화제 복구와 복원의 가능성마저 끊어 놓았다.
이제 그 누구도...
송요화는 송준길의 증손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노론의 핵심 집안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밖으로 나돌면서 혼인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평소 지우(知友)처럼 지내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호연재에게 남편의 존재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외손자 김종걸은 송요화에 대해 “젊어서 호방해서 법도를 생각하지 않으셨다. 외할머니께서 고결한 뜻을 품은 채...
아버지가 노론의 무고로 뒤주에서 굶어 죽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자신의 개혁적 이상을 실현하려면 왕권부터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우선 궁궐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그곳에 신분이나 붕당에 얽매이지 않는 참신한 인재들을 대거 등용한다. 특히 박제가·이덕무 등 서얼 출신을 발탁하는 파격 인사도...
노론과 소론 등 당파적 입장을 명분 삼아 버티던 조선 정치판은 이제 안동 김씨냐 풍양 조씨냐 하는 천박한 수준의 가문 정치 지배구조가 고착된다. 관료는 썩을 대로 썩었고 백성은 핍박받았으며 개혁적 지식인은 무시되었다. 이웃 일본을 ‘왜’라 하며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았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의 보호로 들어가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이 당시 조선의...
자신을 지지하던 100여 명의 노론 세력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뒤 연잉군은 복수를 다짐했고, 왕이 되는 것이 그 길임을 알게됐다. 결국 몸이 좋지 않은 경종에게 상극인 음식 게장과 단감을 진상한 후 연잉군은 왕으로 등극했다.
연잉군은 즉위식을 갖기 전 백대길(장근석 분)에게 "다시 무수리 천출의 자식이라 무시당하지 않겠다"며 "날...
숙종 이후 극심했던 당쟁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됐다. 경종이 왕위 계승을 할 땐 소론이 승리했고, 영조는 노론이 지지한 임금이었다.
이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됐고, 소론의 강경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자면서 일어난 반란이 이인좌의...
역사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이인좌가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서인의 노론과 소론의 갈등 때문이다. 숙종 붕하 이후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소론 강경파는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과 연합해 노론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변을 계획해는데, 이 때 동조 세력 중 한 명이 바로 이인좌였다.
이인좌는 반란을 일으킨지 6일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됐다. 그러나 조선 후기...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노론에 맞서 주자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적 학문태도를 견지한 선비다. 그가 1686년(숙종 12)에 차남 태보(泰輔)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조카 태은(泰殷)이 물은 일은 송림비(松林碑)를 지을 때 내 뜻을 이미 편지에 자세히 피력했으니 어찌 이견이 있겠느냐. 우리 선대는 모두 곧은 도를 지키며 행하다가 끝내 곤액을...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정쟁 과정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노론은 사도 세자의 장인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기 세자의 행동을 영조하게 고발하거나 이간질 했다.
사도세자는 애초에 영조와 다소 성격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효심과 우애, 덕은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론의 이간질에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노론의 의도을 눈치챈 이선은 내탕금을 일부러 평양감사에 전하며 내탕금을 빼돌리는 현장을 덮치려던 노론에 덫을 놓았다. 이 일로 영조는 이선에 대한 의혹을 풀었고, 홍계희 등 노론은 세손책봉을 울며겨자먹기로 도왔다.
영조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 것"을 조언했고 이선은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배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