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단풍 드는 날

입력 2012-07-27 09:36 수정 2012-07-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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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복 외환銀 해외마케팅 차장

“죽기전에저곳에갈수있을지모르겠구나.”

강 건너 북녘 땅을 한참동안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말 아침. 울적해 하시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싶어 고향 땅이 보이는 강 화도로 길을 나섰다. 지난 주 대한적십자사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발표 가 있었다. 이번 상봉에 기대가 크셨기 때문이었을까? 전화도 해보고 몇 번이고 명단을 살펴보았지만, 아버지는 명단에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하시고 며칠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향을 뒤로 한 채 급히 피난길에 오르셨다. 스무 살청년은곧돌아오겠다며길을떠났는데,여든백발의노인이되어서도길이막 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한 때가 언제였던가.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다.창 밖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니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딸 셋을 낳은 후 한참 만에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 얼마나 기쁘셨는지 내가 태어난 날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셨다고한다. 아버지는 늘 나를 안거나 업고 다니셨을 만큼 애지중지 키웠다. 남달리 손재주가 뛰어났던 아버지는 썰매며 연을 직접 만들어 주셨다. 가을이면 동네 어귀 언덕에서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리고, 겨울이면 논두렁 얼음판에서 얼음썰매를 지치며 신나게 놀았다. 때론 아버지 팔베개에 누워 옛날이야기며 아버지 어렸을 적 고향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한없는 사랑을 주셨다.

초등학교때의일이었다. 어느날 나는 같은 반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아버지란 호칭 대신 아빠라고 불렀다.그게 부러웠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용기를 내어 아빠라고 불러봤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건 아버지의 불호령이었다. 이처럼 아버지는 예절만큼은 고지식할 정도로 엄격한 분이셨다.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고, 평생기억에 남을 정도로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다.

사춘기를 겪으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본 시험결과 는 아버지의 기대만큼 충족하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도움이 되는 뭔가를 많이 말씀해 주셨지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와 점점 담을 쌓았고, 서먹서먹한 관계가 지속됐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입학을 했고 2학년을 마친 어느 날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군에 입대하는 날 아침. 인사드리고 뒤돌아서는데 아버지께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래,몸건강히 잘 다녀오너라.”그러고나서는 나를 힘껏 안아주셨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한참을 안고 있다보니 아버지와 나사이에 쌓였던 담이 허물어졌다.

1989년 여름. 나는 강원도 00사단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사격훈련장에서 일이다. 하루의 일과 를 마친 취침 점호시간이었다. 조교는 몇 명의 이름을 부르고는 갖고 있던 편지를 전해줬다. 내가 받은 편지는 다름 아닌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어렵사리 적혀있는 내 이름을 보니 아버지의 글씨가 틀림없었다.

편지를 곧 바로 읽고 싶었지만 취침 나팔소리에 맞춰 소등을 했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침번에게 화장실에 가겠다며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있는 희미한 전등불 아래에서 편지봉 투를 뜯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아버지의 편지.

‘사랑하는 아들에게’ 라고 시작하는 문구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글자들이 모두 춤을 췄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동시에 밀 려왔다. 한 여름 밤 모기에 온 몸을 뜯겨가며 읽었던 편지는 지금도 잊을 수 가없다.

창 밖을 보니 곳곳에 추수를 마친 너른 김포평야를 지나 저 멀리 강화의 관문인 초지대교가 눈앞에 보였다. 길가 곳곳에 곱게 핀 코스모스, 붉게 물든 단풍나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어느덧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강화평화전망대가 보였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먼발치에서나마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북녘 땅까지는 2Km 남짓, 손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하다.

“저 쪽 연백평야 보이지? 그 뒤 산 너머 마을이 이 애비 고향이다. 어머니하고 동생들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구나.”

황금들녘의 널따란 평야. 아, 저곳이 어렸을 적 내게 말씀해 주셨던 아버지가 놀던 고향이구나.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고향의 흔적 하나라 도 더 찾으시려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가족의 소중함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한국전쟁은 이산가족에게 고통의 상 처만 남겼다.

“이제 가자꾸나.”

한참동안을 북녘 고향땅을 바라보다 전망대를 나서는 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니 손수건으로 계속 눈가를 닦으셨다. 측은한 마음에 가 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아버지!”

돌아서는 아버지 어깨를 꽉 껴안았다. 어렸을 적 안겼던 아버지 품. 어른이 되어서 처음으로 안아드렸다. 아버지의 어깨는 든든한 나의 버팀목 이었다. 내가 힘들었을 때 나를 지켜주셨던 아버지. 그러나 넓게만 생각했던 그 어깨가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이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버지를 모시고 신명나게 이 앞을 지날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며 지금처럼 가 슴을 메일까. 아버지께 용기를 내어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 을 꺼냈다.

“아...버...지...사랑해요.”

“...”

“...”

“그래. 고맙다, 이 애비도 너를 사랑한다.”

아버지와 나는 곱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오랫동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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