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전기통신 금융사기, 이른바 ‘보이스피싱’ 범죄에 적극 가담한다는 인식이 없더라도 전기통신사업법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다는 사실을 몰랐어도 본인의 대포통장을 제공하는 행위는 금융실명제 위반이라는 2022년 10월 대법원 판단과 궤를 같이 하는 판결이다.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사기 및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모(55) 씨에 대해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부분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고 10일 밝혔다.
퀵 배달원인 김 씨는 △지난해 3월 2일~22일 대구 중구 한 고시원에서 중계기와 유·무선 공유기 1대씩 설치해 인터넷망에 연결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원 지시에 따라 유심을 중계기 특정 번호에 꽂았다가 옮겨 꽂고 △같은 해 3월 22일부터 4월 4일까지는 대구 동구 주거지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유심을 옮겨 꽂는 방법으로 47개 휴대전화 번호를 관리했다.
김 씨의 이런 행위로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피해자 다수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는 게 검찰이 김 씨를 재판에 넘긴 공소제기 요지다.
재판에서는 타인통신 매개 행위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죄에 관한 고의 인정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1심과 2심 법원은 타인통신 매개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에게 자신이 설치한 통신 중계기나 유심 등이 범죄를 위한 전화 발신이나 문자메시지 발송에 활용된다는 사실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고의나 공모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법원은 검찰이 김 씨에게 적용한 타인통신 매개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죄를 ‘유죄’로 뒤집었다. 이에 대법원은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구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전기통신사업법에서 금지한 타인통신 매개 행위의 ‘고의’는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 사이의 통신을 연결해 준다는 점에 관한 인식을 요할 뿐”이라며 “더 나아가 통신이 매개된 타인이 그 통신을 범죄에 이용했다는 점까지 인식할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피고인은 고의로 이 같은 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여지가 충분하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고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판시했다.
앞서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022년 10월 27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불법 환전 업무를 도와주면 대가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자신의 금융계좌번호를 알려줬는데, 불법 환전이 아닌 실제로는 보이스피싱 편취금 은닉에 사용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위반 방조죄 상고심에서, 피고인에게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한 바 있다.
이 때에도 대법원은 “피고인이 정범인 성명불상자의 탈법행위의 구체적 목적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범죄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