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기억력과 집중력 강화에 좋은 약’이라며 마약 탄 음료를 건네받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청역과 대치역 인근에서 2명씩 짝을 이룬 일당 4명이 학생들에게 필로폰 성분이 첨가된 음료를 나눠줬는데요. 이들은 구매 의사를 확인하는 데 필요하다며 부모 전화번호를 받아갔죠. 학부모들은 “자녀가 마약을 복용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학교에 알리겠다”는 내용의 협박 전화를 받았습니다. 현재까지 음료를 섭취한 피해자는 학생 7명과 학부모 1명 등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학생들에게 음료를 건넨 마약 살포책 4명은 모두 체포되거나 자수했습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했을 뿐 마약 성분이 든 음료인 줄은 몰랐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경찰은 이들 가운데 과거 보이스피싱 수십 건에 현금 수거책으로 가담한 전력이 있는 20대 김모 씨를 제외한 3명이 단순 부업 차원에서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공범 수색에 나섰습니다
국내 중간책인 길모 씨와 30대 김모 씨도 붙잡혀 10일 오후 구속 여부를 가리는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중입니다. 길 씨는 원주에 있는 자택에서 마약 성분이 든 음료를 제조해 사건 당일 퀵서비스와 고속버스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습니다. 30대 김 씨는 마약 음료를 마신 학생들의 학부모를 협박하기 위해 해외 전화번호를 국내 발신자 번호로 바꿔주는 중계기를 설치하고 운영했죠.
중간책인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들과 말단에 해당하는 마약 살포책 4명도 서로를 모른다고 말했죠. 범행 가담자들이 서로를 모르는 ‘점조직’ 형식으로 운영된 건데요.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입니다. 또 마약 음료를 제조한 길 씨도 윗선에게서 범행을 지시받은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윗선’에 해당하는 이모 씨와 박모 씨는 특정 장소에 마약을 숨기고 이후 구매자가 찾아가게 하는 ‘던지기’ 수법을 통해 길 씨에게 필로폰을 전달하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겼습니다. 경찰은 범행 전반을 기획한 총책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 중입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이른바 ‘퐁당’ 수법이 도입됐다고 보기도 합니다. ‘퐁당’은 다른 사람의 음료나 술잔에 몰래 마약 성분을 넣는 범죄를 칭하는 은어입니다. 이번 ‘마약 음료’ 사건에서 일당이 학부모를 협박했듯, 퐁당은 이후 성범죄, 협박, 금전 갈취 등 2차 범죄로 이어지곤 하죠. 과거 성폭행 ,성매매 등에 ‘퐁당’ 수법이 활용돼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2018년 버닝썬 사태 당시 ‘물뽕’이라 불리는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을 이용한 성범죄인데요. 무색·무미·무취의 약물을 탄 음료에 피해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퐁당’ 범죄 자체를 처벌할 수 있는 별도 규정이 없어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마약 투약으로 피해자에 생리적 문제가 생기면 형법상 상해죄, 이후 성범죄 등 2차 범죄로 이어지면 그에 대한 별도 죄목을 적용할 수 있지만, ‘퐁당’ 자체에 대한 처벌 방법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이에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퐁당 수법으로 인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마약류관리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마약 소지·소유·관리·수수에 대해 처벌하는 기존 법안의 처벌 대상을 마약 투약 또는 제공까지로 확대하고, 타인의 의사에 반해 마약을 은밀하게 투약한 자를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추가했죠.
마약은 향후 중독으로 인한 피해를 남기는 만큼, 애초 사건 예방이 중요한데요.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예방법은 ‘퐁당’ 수법이 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 해외 국가는 한국에 앞서 이러한 문제를 맞닥뜨렸습니다. 이에 마약 중독 치료 센터 등에서는 바, 콘서트, 파티, 클럽, 술집 등 타인이 음료에 약물을 탈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내하고 있는데요. 다른 사람이 주는 음료나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개봉된 음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잔을 두고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하며, 불가피하게 잔을 두고 자리를 비웠다면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도 얘기하죠. 나아가 믿을 수 있는 친구, 동행인과 함께하며 평소보다 더 취해 보이진 않았는지도 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방안 가운데 하나는 간이 마약 진단 키트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경찰은 버닝썬 게이트를 계기로 2019년부터 마약 진단 키트 개발에 착수해 지난해 10월 첫선을 보였습니다. 올해 중에는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키트도 상용화될 예정입니다.
최근에는 젤리, 사탕 등 간식류로 위장한 마약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마약 탄 음료 사건이 알려지며 대치동 학부모 사이에서는 ‘지난해에도 마약 성분이 든 사탕과 함께 학원 홍보 전단지를 나눠줬다’는 소문이 돌고 있죠. 학부모 사이에서는 ‘마약 조직이 학생들을 마약에 중독시켜 마약 예비 수요층을 만들고자 한다’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아직 국내에서 마약 젤리나 마약 사탕이 큰 문제로 불거진 적은 없습니다. 다만 해외에서는 이미 마약 사탕 등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만큼 간식류로 위장한 마약에 대해서도 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핼러윈 전후로 불량식품 사탕과 비슷한 생김새의 ‘펜타닐 사탕’ 주의보가 발령됐습니다. 알록달록한 색상인 사탕의 겉모습과 달리, 섭취 시 극소량만으로도 근육경직, 호흡곤란 등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죠. 끔찍한 부작용과 심각한 환각 효과로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은 미국에서 6년간 약 21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 태국 등 마약이 일부 허용된 국가에서 밀반입되는 마약류 간식에 대해서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데요. 마약이 함유된 제품인지 모르고 밀반입을 시도하다가 적발되거나, 해외에서 섭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두 가지 경우 모두 처벌 대상입니다. 일례로 최근 프로배구 여자부 페퍼저축은행의 한 외국인 선수가 ‘대마 젤리’로 불리는 CBD 젤리를 소지해 퇴출당했습니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으나, 대마 성분이 포함돼 있어 한국에서는 불법이죠. 미국에서는 대마 젤리 이외에도 쿠키, 사탕, 초콜릿, 오일 등 다양한 형태로 대마가 가공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모두 금지 물품입니다. 겉보기에는 일반 간식과 잘 구분되지 않아 HEMP, Cannabis, CBD, CBN, THC 등 대마를 뜻하는 단어가 표시되어 있진 않은지 확인해봐야 하죠. 최근 일부 마약류가 합법화된 태국에서도 대마초, 크라톰 잎 등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습니다. 잎 형태의 마약은 허브차 티백 등으로 위장해 유통되거나 가공식품에 포함되어 있어 주의가 필요하죠.
이렇듯 일상을 침범하는 마약에 정부는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식서 ‘마약과의 전쟁 승리’를 당부한 데 이어 6일 검찰과 경찰에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마약의 유통·판매 조직을 뿌리 뽑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대검찰청·경찰청·관세청·교육부·식품의약품안전처·서울시는 10일 마약 수사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할 ‘마약 범죄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발표했죠. ‘마약 청정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개인과 사회 모두의 주의가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