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오션 찾아 경쟁하던 시절 지나
기업 수명 단축...이미 전성기 지났다는 평가도
정보혁명 이후 더 새로운 목표 찾기도 어려워
미국의 혁신 성장을 이끌었던 기술업계가 혹한기를 맞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의 최대 수혜주로 꼽혔던 기술기업들이 이젠 연이어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있다. 코로나19 수혜가 끝나버린 데다 시장 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분석했다.
지난해 말 이후 기술업계를 설명하고 있는 표현은 ‘중년의 위기’다. 블룸버그통신은 “기술기업들이 격렬한 변덕에 충동적인 결단, 그리고 심한 후회에 시달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애틀랜틱은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산을 정복하고 난 뒤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기존 삶의 방식이 흔들리는, 기력을 잃고 나이 들어감을 자각하는 중년의 위기가 기술업계에 닥쳤다는 의미다.
기술기업의 구조조정은 지금, 하필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코로나19 대유행 약 2년간 거리두기와 원격근무 확산으로 극적인 성장을 했던 기업들은 당시 인력 등을 확충하며 몸집을 키웠지만, 코로나 특수가 끝난 지금은 비용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동시에 세계 각국이 공격적 긴축에 나서면서 기업들은 투자금 조달이나 실적 난항을 겪게 됐고, 인건비를 비롯한 비용 절감을 돌파구로 삼게 됐다.
그러나 닛케이는 기술기업의 ‘연쇄적인’ 구조조정, 즉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위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장의 환경적 요인 외에 ‘기술업계 자체의 문제’가 기저에 깔려 있어서 위기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선 빅테크 시장은 이미 커질대로 커진 ‘성숙한 시장’이다. 각 기업의 규모도 거대해졌다. 구글은 세계 검색의 90%를 독점하고, 전 세계에 보급되는 애플 기기는 20억 대를 넘어섰다. 메타의 페이스북은 월간 30억 명이 사용한다. 아마존은 소비대국 미국 인터넷 쇼핑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은 블루오션을 찾아 경쟁하던 시기를 지나 서로의 사업 영역을 잠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 문화도 달라졌다. “기존의 기업과 같은 회사가 되지 않겠다”라는 목표로 시작한 구글도 이제 자회사를 포함해 19만 명이 일하는 대기업이 됐다. 놀이터 같은 사무실에 무료 카페테리아 등 참신한 직장 만들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기술기업들도 이제는 점심 소고기 하나에도 반대 의견이 나온다.
대기업이 인공지능(AI)과 드론 등 민감한 기술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자 각국 정부와의 관계나 규제 등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포괄적인 기술 규제에 앞서고 있는 건 유럽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 법무부도 구글에 인터넷 광고 사업 분할을 요구하는 소송에 나섰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유분방하던 시절은 끝났다고 닛케이는 설명했다.
기업의 수명이 단축됨에 따라 기술기업들이 이미 전성기를 지나쳤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컨설팅업체 이노사이트에 따르면 S&P500 기업의 수명은 평균 30~35년에서 앞으로 10년 새 15~20년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이미 메타는 19세, 구글과 아마존은 각각 24세, 28세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무려 47세, 애플도 46세다. 교체가 빠른 미국 시장에서 이미 이들은 젊은 기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잇따른 경영진 교체도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을 뒷받침한다고 닛케이는 해석했다. 험난한 성장 과정을 지켜낸 기업가가 회사를 떠나는 건 업계가 저무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는 우주개발을 위해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났고, 메타를 인터넷 광고 거인으로 키워낸 셰릴 샌드버그도 은퇴했다.
차세대를 이끌 ‘문샷’, 즉 달 탐사선 개발과 같은 혁신적인 프로젝트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아마존의 경우 지난해 가을 사내 극비 연구소를 대폭 축소하면서 에너지와 환경 관련 일부 프로젝트를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스마트폰과 앱을 통해 모든 분야에서 정보혁명을 일궈낸 기술업계가 정복 욕구를 일으킬 만한 다음 목표를 선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다만 나이 든 기술 기업을 떠난 인재들이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혁신의 씨앗을 뿌릴지 알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닛케이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