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여 채 빌라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받고 의문사한 이른바 ‘빌라왕’의 배후로 분양 컨설팅 업체가 지목받고 있다. 빌라의 법적 소유자였던 정모 씨는 명의만 대여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바지사장(가짜 사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수사당국은 보고 있다.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전세 사기는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 당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11일 당국에 따르면 경찰은 제주에서 사망한 ‘40대 빌라왕’ 정 모 씨의 배후 세력을 입건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틀 전 기자간담회에서 “사망한 임대인의 배후가 최근 확인돼 수사 중”이라며 “유사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판단돼 철저히 수사하겠다”라고 밝혔다.
정 씨는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등에서 빌라 240여 채를 ‘무자본 갭투자’로 사들여 세를 놓다가 2021년 7월 자신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무자본 갭투자는 자기 자본 없이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밑천으로 주택을 매입하는 방법을 말한다. 정 씨 사망 후 세입자들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정 씨의 배후로는 ‘분양 컨설팅 업체’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30대 신모 씨가 대표로 있는 한 부동산중개법인을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이 법인이 부동산 공인중개사, 세입자들과 접촉하며 실질적으로 빌라 전세 사기를 주도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경찰은 정 씨 등 이른바 빌라왕들이 컨설팅 업체 측에 사실상 빌라 소유자 명의만 제공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정 씨 사건 수사 과정에서 대리인이 위임장을 들고 다니며 매매·임대 계약을 한 사실을 확인하고 실제 거래 주체가 누구인지 추적한 끝에 해당 컨설팅 업체의 존재를 파악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실제로 정 씨 명의의 빌라에 입주해 전세 사기 피해를 본 피해자 상당수도 “신 씨 업체 소속 직원이 대리인으로 나와 전세계약을 했다”라고 증언했다.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전 재산을 뺏기는 것도 넘어 거액의 빚까지 떠안을 처지에 놓였다. 특히 사회 초년생이나 신혼부부들은 새 출발의 갈림길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살던 전셋집을 빼고 신혼집으로 들어가기만 고대했던 한수정(가명) 씨는 PD수첩에서 출연해 웨딩사진을 가리키며 “저희 신혼집 가서 걸려고 했던 액자인데, 못 걸고 계속 언제 걸 수 있을지만 기다린다”라며 “신혼이 끝난 다음에라도 걸 수 있을지 모르겠는 상황”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이사 가면 예쁜 집에 그릇 예쁘게 꺼내놓고 쓰려고 정말 그릇만 예쁜 거 사서 모았고, 가서 꺼내놓고 써야지”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씨가 사는 집의 문제를 알게 된 건 다른 피해자를 통해서였다. 그는 “결혼식 다음 날 옆집 분이 오더니 혹시 등기부등본 한번 떼보라고 하더라”며 “확인해보니 압류가 걸려있는 사실과 집주인 바뀌어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설명했다.
집을 구하던 중 방 두 개 전세를 찾게 된 최하윤(가명) 씨는 유튜브 채널 씨리얼에 나와 “잔금과 동시에 임대인은 신탁등기를 말소한다는 특약 사항이 있었지만, 집주인이 이행하지 않았다”라며 “이사 날 짐을 풀어놓으려고 왔는데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어 중개사 보조원에게 전화했더니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최 씨는 “예상하건대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을까”라며 “개인회생을 하더라도 직장 생활 8년 동안 하면서 계속 모아놨던 돈도 없어졌다”라고 했다. 최 씨는 언제 집에서 나가야 하는지 몰라 2년 동안 짐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전세 계약 때 임대인이 작정하고 임차인을 속이면 딱히 손 쓸 방법이 없다. 그만큼 허점이 많다는 얘기다. 전세 계약 잔금 날 전입신고 후 확정일자를 받으면 다음 날 0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이 사이 해당 물건을 매도하는 수법이 대표적이다.
임대인이 받은 잔금으로 근저당권을 말소한다는 특약이 있지만, 전적으로 임대인의 양심을 믿어야 한다. 잔금을 근저당권 말소에 사용하지 않고 개인 자금으로 쓸 수 있는 셈이다.
전세 계약할 때 임차인이 확인해야 할 건 △등기부등본 직접 열람하기 △등기 표제부 토지 별도 등기 확인하기 △임대인의 세금 체납 여부 확인하기 △임대인이 받은 잔금을 근저당권 말소에 쓰였는지 확인하기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받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하기 등이다.
일반적으로 부동산 중개인이 물건 등기부등본을 뽑아 제공한다. 그러나 임차인이 직접 온라인으로 열람하는 게 좋다. 표제부에 토지별도 등기가 있는 것도 확인해야 한다. 말소되지 않은 별도 등기가 있으면 온라인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까지 임대인이 세금 체납 여부 확인을 거부할 수 있었고, 세금이 임차인 보증금보다 선순위 채무였다. 그러나 올해 4월부터 집주인의 동의 없이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포함 신분증) 사본이 있으면 열람할 수 있다. 4월 전까지는 집주인의 동의를 받은 ‘미납국세 등 열람신청서’와 집주인 신분증 사본을 지참해 세무서에 열람할 수 있다. 계약서 작성 전에 미리 국세완납증명서를 받아 놓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잔금 전달 전에 가까운 세무서에서 ‘미납국세 열람신청’을 통해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확정일자 이후에 추가된 체납세금은 전세보증금보다 후순위로 밀리도록 바뀐다. 흔히 근저당권이 설정된 집을 매매할 때 ‘임대인이 잔금으로 근저당권을 말소한다’라는 특약을 넣는다. 그러나 임대인이 이를 이행하지 않고 도주할 수 있다. 근저당권 채권자에게 돈을 돌려줬는지 확인하고 채무 완납 영수증을 받아야 한다. 은행 대출일 경우 같이 가서 대출을 갚은 후 대출 완납 영수증과 근저당권 말소 신청 접수증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