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지금은 버튼 하나로 가능하지만, 옛날엔 노래 하나 듣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테이프를 연필로 감고, 다음 곡을 듣기 위해 버튼을 쉴 새 없이 딸깍거리고, 재생이 끝나면 테이프를 뒤집고…. 그런데 요즘 이 수고로움을 마다치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2~3년간 계속된 레트로 열풍 덕분이다.
자신을 '과거의 것을 사랑하고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김예은 씨는 지난해 봄부터 '워크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익숙한 MZ세대지만, 예은 씨는 직접 테이프를 감고 좋아하는 노래를 한데 모아 데크로 공들여 녹음한다. 물론 플레이리스트에 어울리는 표지를 손수 만들어 인쇄하는 정성도 잊지 않는다.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워크맨은 사실 제품 이름에서 비롯됐다. 1979년 소니는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음악을 듣는다는 의미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Walkman)을 출시했다. 지금은 오래된 과거의 상징이지만, 당시에는 집 밖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 그 자체였다.
예은 씨는 최근 '기억의 습작'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고 워크맨 사용 경험과 레트로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워크맨의 매력으로 '변수'가 많은 점을 꼽았다. "워크맨은 음악을 듣던 중 카세트가 씹힐 수도 있고, 피치가 심하게 오르내리고, 가끔은 음성변조 한 것처럼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온다. 정직하게 입력된 음만을 뱉어내는 CD, MP3와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워크맨에 더욱 애착이 간다. 아날로그틱한 음질은 덤이다."
2018년부터 워크맨을 수집한 정연천 씨는 워크맨의 매력으로 '기다림'을 꼽았다. 그는 "곡을 넘기려면 빨리 감기로 30초라도 기다려야 하는데, 워크맨이 돌아가는 기계음은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연천 씨의 소장품 중 가장 아끼는 워크맨은 1990년 아버지께서 사주신 워크맨이다. 다른 하나는 1997년 소니에서 특별히 제작한 금장 워크맨이다.
하지만 정연천 씨는 "수리할 때 고생한 기기들이 더 애착이 간다"고 강조했다. 애써 산 중고 제품이 고장 난 걸 계기로 하나둘 고치다 보니 연천 씨는 어느새 수리 의뢰까지 받는 전문가가 됐다. 사진과 출신으로 평소 기계와는 먼 삶을 살았지만, 동호회에서 알음알음 정보를 얻고 구글에 검색하며 기술을 익혔다. 그는 그동안 쌓은 정보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나누고자 2일 '워크맨 팩토리'라는 네이버 카페를 열기도 했다.
워크맨은 매력적이지만, 디지털에 익숙하다면 많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또 중고 매물이기 때문에 초보라면 제대로 된 좋은 제품을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김예은 씨는 "처음 워크맨을 구매할 때, 판매자에게 정확한 플레이 영상을 요구하고, 카세트 벨트를 교체한 지 얼마나 됐는지 확인하라"고 조언했다.
또 워크맨 구매 시 △음 떨림 여부 △속도 정 박자 여부 △보조 밥통 포함 여부 등도 확인해야 한다. 보조 밥통 사용 여부는 기기에 따라 달라진다. 옛날 기기는 대부분 '껌 전지'라는 네모난 충전식 건전지를 사용하는데, 이를 알칼라인 건전지로 변환해 주는 보조 밥통이 필요하다.
정연천 씨는 "제일 확실한 방법은 알려진 분에게 사는 것"이라며 중고나라 같은 플랫폼 대신 동호회에서 제품을 사라고 말했다. 보통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경우 중고나라에서 팔고, 상태가 좋은 기기는 동호회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보통 외관이 깨끗하면 기계가 깨끗한 경우가 많고, 고가 기기일수록 제품 첫 구매자와 수리자 확인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구매만큼 워크맨이 고장 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별한 관리법이 있는 건 아니다.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는 기기의 특성상 지속적인 작동이 필요하므로, 최소 일주일에 30분씩 사용하면 된다. 카세트테이프는 자석을 가까이하지 말고, 서늘하고 통풍이 잘되며 햇빛이 없는 곳에 보관한다. 또 테이프를 너무 자주 감으면 잘못하다 꼬일 수 있으므로 삼가는 게 좋다.
예은 씨는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3000원짜리 드라이버 세트를 하나 구입하라"고 추천했다. 벨트 교체나 속도 조절 같은 간단한 수리는 드라이버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음악을 듣는 도구는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음악은 늘 감동을 전하고 우리를 위로한다. 버튼 하나로 노래를 재생하고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을 수 있는 간편한 세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듣는 이유는 테이프를 공들여 감아 음악을 듣는 과정이 음악이 전하는 위로와 감동의 진폭을 키우기 때문이 아닐까.
김예은 씨는 코로나로 요즘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밴드 새소년의 노래 '자유'를 추천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힘껏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고. 마스크가 가로막은 자유가 그리울 때, 딸깍 재생 버튼을 누르고 시원한 바람을 맞아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