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차별을 일으킬 수 있는 항목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실력(직무 능력)으로 평가해 뽑는 '블라인드 채용'이 우리 사회에 빠르게 자리 잡아가는 추세다.
하지만, 채용된 뒤에는 어떨까.
채용 때에는 블라인드 방식을 지켰지만, 상당수 기업은 채용 뒤 입장을 바꿔 부모의 직업과 직위까지 샅샅이 조사하는 관행을 탈피하지 못했다고 신입사원들은 불만스러워 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이렇게 취합한 개인정보가 결국 부서 배치나 신입 평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냐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공공기관에서부터 시작된 블라인드 채용이 일반 기업으로 확대되면서 입사 과정에서 구직자가 가족사항을 알리는 일은 많이 줄었다. 학벌, 지역, 부모의 지위 등은 보지 않고 능력만으로 평가하겠다는 본래 취지 때문이다. 특히, 올해 7월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기업이 구직자의 직계 존비속과 형제자매의 학력ㆍ직업ㆍ재산을 요구하면 법적 책임을 지게 되면서 블라인드 채용은 이제 채용 방법의 기준이 됐다.
문제는 입사 이후다. 일부 기업은 관행처럼 인사기록카드에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개인정보를 적도록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입사 이후 신입사원에게 부모나 형제, 자매의 직업과 직위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위법이 아니다.
7월에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적용하기도 모호하다. 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인사기록카드에 부모의 직업을 쓰는 것만으로는 법의 구성 요건에 포함될지 판단하기 어렵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최 노무사는 "하지만, 이를 토대로 인사고과 등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법리를 다툴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신입사원들은 불안하다는 입장이다. 채용 때까지만 해도 능력만 본다던 회사가 입사하자마자 부모 직업과 직위를 구체적으로 적어내라고 돌변하니 혼란스러움을 느꼈다는 것.
첨단소재 대기업인 A사에 11월 입사한 김모(27) 씨는 "연수 이후 부서 배치를 받거나 이후 인사고과평가에서 부모의 직업이나 직위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지, 신입사원끼리 웅성거리기도 했다"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사회가 점점 더 공정해진다고 믿지만, 여전히 부모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라고 현실을 꼬집었다.
얼마 전 B 제약회사에 입사한 최모(29) 씨는 개인정보 유출이 민감한 시대에 여전히 가족사항을 적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불만스러워 했다. 최모 씨는 "회사 인사팀은 원치 않으면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지만, 어떤 신입사원이 그럴 용기가 있겠느냐"면서 "구성원들의 불만은 많지만, 경영진은 예전의 방법을 고수한다는 태도여서 간극이 크다"라고 말했다.
반면, 가족사항 기재를 요구한 기업 상당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가족에게 연락해야 하고, 오히려 사원의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제조 대기업인 C사 인사팀 관계자는 "사원의 부모나 형제, 자매 생일날에 꽃다발을 보내주려고 해도 직장 위치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해당 정보를 다른 용도로 사용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채용담당자의 실수라고 한 곳도 있다. 첨단소재 대기업 A사 인사팀 관계자는 "옛날에 쓰던 서식일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가족사항 기재를 몇 년 전 폐기했다"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신입사원을 차별 대우하거나 부당 대우하지 않았다. 즉각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새로운 서식을 제공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처하겠다"라고 밝혔다.
대부분 신입사원은 본인 외 가족정보는 최소한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 중심의 인재 활용'이라는 기조를 위협하는 요소이자, 혹시 모를 색안경이나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 부모의 학력 정보도 수집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 활동가는 "부모의 학력이 의미 있는 정보라고 보기 어렵다. 불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관행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만, 과도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폐지하는 것이 옳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