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그들만의 시간

입력 2017-04-05 11:04 수정 2017-04-0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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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형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명동역에서 지하철을 탈 때는 늘 맨 앞칸의 첫번째 출입문인 ‘1-1’을 이용한다. 집에 가기 위한 최단거리를 경험으로 익혔고,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탓이다. 그 자리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많은 이들이 이곳을 통해 내리는 덕에 예기치 못한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 나의 행운에 제동을 건 ‘1-2’의 그 남자는 통통한 여자친구의 손을 이끌어, 나를 기다리던 자리를 그녀와 함께 차지했다. 다분히 나를 의식한 듯 허우적대는 듯한 손짓에 잠시 멈칫한 것이 나의 패인이었다.

승차할 때의 요란함과는 달리 그들의 대화에는 아무런 소음이 없었다. 손잡이를 쥔 나의 손 왼편으로 그와 그녀의 대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입이 아닌 손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쉬지 않고 열 번을 움직이면 여자는 가볍게 한두 번 두 손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듯 움직였고, 남자는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큰 웃음을 그녀에게 지어 보였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대화에 조금씩 빠져들어갔다.

그들의 대화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아무도 들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1-1에서 1-2 사이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와 눈을 모았지만, 그 내용을 알아들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 군중 속에서 그렇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낸 그들은 자기만의 다정한 섬을 만들어 낸 듯했다.

열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지하철이 달리는 동안 나는 신문 한 장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그들의 즐거운 대화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행복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기도 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무언가 눈빛으로 건네기도 했다. 그 간절한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중한 무게가 실린 듯했다.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라고 생각하다 나의 건방짐을 꾸짖기도 하고, 소리가 없기 때문에 덜 싸울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 내 가벼움에 다시 한 번 자책하고….

사랑. 다른 어떤 말로 그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가벼운 입이 아닌 뜨거운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하는 저 손짓에, 또 한 번 그 진부한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는 내 표현의 한계가 그저 아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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