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etoday.co.kr/pto_db/2016/12/20161229105306_996109_200_300.jpg)
왜냐? 너무나 자주 쓰인 탓에 값어치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지난 몇 해 동안 뉴스에 너무나 자주 등장했습니다. 포털에서 검색해 보십시오. ‘골든타임’이 들어간 뉴스 9만3000여 건이 순식간에 뜹니다. 이게 무슨 금이겠습니까? 금은 귀해서 금인데!
원래 이 단어는 방송과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한국과 일본 방송인들이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 광고료를 금값처럼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시간대를 ‘골든타임’이라고 했지요. 실제 9만3000건의 뉴스 중 초기 것에는 이 단어가 이런 의미로만 쓰였습니다. (미국 방송가에서는 프라임 타임-Prime Time-이라고 쓴답니다.)
이 단어가 ‘무엇을 하기 위해 가장 귀중한 시간’이라는 의미로 본격 사용된 건 지금 대통령이 연설이나 인사말에 동원하면서부터인 듯합니다. 대통령은 2013년 4월 17일 새누리당 소속 국회 정무·기획재정위원 오찬에서 “의학계에서는 응급치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골든타임’이 굉장히 중요한데, 추경 예산안이나 부동산 대책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이 단어를 공식 석상에서 사용한 건 그 얼마 전 방영돼 인기를 끈 TV드라마 ‘골든타임’ 때문일 겁니다. 드라마 주인공인 외과 의사들은 ‘심장 마비, 호흡 정지, 대량 출혈 등이 일어난 후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란 뜻으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이 줄을 쓰는 순간 기자적 모진 충동이 튀어나옵니다. ‘혹시 최순실 씨가 대통령 인사말을 첨삭하면서 이 단어를 밀어 넣었나?’라고 의심해 본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의 이 인사말 이후 장관, 지자체장, 공공기관장들도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합니다. 기사와 칼럼에도 등장합니다.
대통령이 처음 이 말을 한 날부터 1년에서 꼭 하루가 모자라는 이듬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골든타임’이 봇물 터진 듯 사용됩니다. 처음엔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시간을 허비한 것을 두고 “구출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식으로 절망을 담아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세월호 사건으로 대한민국호가 바로 항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맞았다”며 희망에 찬, 미래지향적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오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세월호 침몰사고 상황 보고를 받고 있다.](https://img.etoday.co.kr/pto_db/2016/12/20161229104915_996101_500_342.jpg)
“세월호 참사를 조사하면서 드러난 정치·경제·사회 구석구석을 모조리 썩게 만든 부패와 부정의 고리를 끊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온 모든 비리를 없애며, 지연·혈연·학연으로 연결된 인적 관계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게 어찌 골든타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지요.
대통령도 약 4개월 뒤 무슨 회의에서 “(규제를 혁파하지 못하면) 10년, 20년 후엔 우리 대한민국은 설 땅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에, 골든타임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모두가 국민도 같이 공감을 해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내야만 우리의 미래가 있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도 떳떳한 세대가 될 수 있다는 이런 각오로 정말 우리나라가 나아갔으면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발언이 깔끔하진 않지만 대통령도 이 단어 사용의 새 흐름에 편승한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담은 골든타임은 번번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우리 옆에 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들어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게 그 증거입니다. “최순실 사건으로 이제 정말 대한민국이 바로 서게 될 기회를 맞았다. 우리는 진정한 골든타임을 맞았다”라는 말과 글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닙니까.
하지만 이런 말, ‘대통령과 최순실 덕분에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바로 설 기회가 왔다’는 말을 듣노라면 씁쓸하고 허탈하기만 합니다. 그 많은 골든타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해 지금 이 지경이 됐는데 또 “골든타임이 왔다, 우리 모두 잘해 보자”는 말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유년 새해에는 골든타임이라는 말이 없이, 그저 평안히, 평안히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썼습니다.
하나 덧붙일 게 있네요. 영어 사용 국가에서는 ‘골든타임’을 과거의 좋은 때를 말할 때 쓰지, 우리처럼 미래에 대비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뜻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말이 좋은 예문이 되겠습니다. “The Marcos era was the golden time for the Philippines.” “우리 남편 그 시절, 그때가 내 골든타임이었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미래의 귀중한 시간은 ‘골든아워’라고 표현한답니다. 어긋난 용어 사용도 우리의 골든아워를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