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 풍경] 재홍이네 큰집 라디오

입력 2016-07-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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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우추리라는 마을은 강릉 시내에서 참 멀다. 아니, 실제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그냥 심정적으로 먼 시골 동네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강릉 시내의 여러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우추리 아이들 별명이 모두 ‘우추리’일 만큼 강릉에서도 독특하게 대접을 받는 동네다. 한마디로 촌 동네의 대명사였다.

그런 우추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얘기다. 어느 동네나 동네 앞엔 거의 다 개울이 흐른다. 우추리도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 옆에 ‘바다리’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원래 이름은 ‘방학다리’이다. 그걸 빠르게 말하다 보니 ‘바다리’가 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아래 정미소 앞에 놓인 다리인데 학교가 방학을 하는 다리가 아니라 옛날에 그곳에 학이 날아와 놀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다. 내가 어렸을 땐 나무로 만든 섶다리였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 섶을 깔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은 다리였다. 옛날에는 학이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어릴 때 그곳에서 학을 본 적이 없다. 정미소의 오리들만 시끄럽게 꽥꽥거릴 뿐이었다.

어릴 때 우리는 학 대신 그 개울에 떠다니는 정미소의 오리들과 즐겨 놀았다.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오리들과 사이좋게 노는 것이 아니라 오리를 골탕 먹이며 놀았다. 오리만 골탕 먹이는 게 아니라 오리 주인인 방앗간 주인도 함께 골탕을 먹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 놀이치고는 좀 무지막지한 데가 있었다. 오리가 냇물의 고기를 모두 잡아먹는 게 얄미워 어른들 몰래 오리를 잡아서 주둥이를 실로 친친 묶어놓았던 것이다.

봄부터 시작한 장난인데 여름쯤에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다른 오리들은 우리가 아무리 실로 주둥이를 감아놓아도 그걸 땅에 비벼서 스스로 푸는데 바보 같은 오리 한 마리가 그걸 못 풀고 며칠 주둥이가 묶인 채 돌아다니다 죽어버린 것이다. 당장 정미소 아저씨가 학교로 쫓아왔다. 그날 우리는 선생님한테 참으로 많이 혼이 났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 반 재홍이네 큰집 라디오에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둥이를 묶어놓은 오리가 죽자 정미소 아저씨가 학교로 쫓아오고, 선생님이 우리들을 혼낸 얘기가 재홍이네 큰집 라디오에 나와 재홍이가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나왔느냐고 몇 번을 물어도 몇 번 다 그렇다고 했다.

라디오가 참 귀하던 시절이었다. 동네에 한두 대가 있거나 말거나 했다. 우리는 이따금 거짓말도 잘하는 재홍이의 말이 미심쩍기는 했지만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 우리의 장난은 동네에서 가장 큰 뉴스거리였기 때문이다.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정도 난리가 날 정도라면 당연히 라디오에 나올 만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판단이었다.

지금도 재홍이를 만나면 그때의 일을 얘기한다. 그러면 이 친구는 그냥 씩 웃고 만다. 그때의 거짓말이 씨가 되었는지 이 친구는 서울의 어느 유선 방송사에서 엔지니어로 오랫동안 일했다.

지금은 방송사도 여러 군데인데 아마 그때 재홍이네 큰집 라디오야말로 어린 재홍이가 자기 혼자 상상 속에 운영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유선방송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엔 참 작은 뉴스 속에 살았는데 지금은 너무 무서운 뉴스들만 우리 귀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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