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겨우살이를 준비하며

입력 2015-12-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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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시래기’ 2006) 시인 도종환은 시래기의 헌신(獻身)을 한껏 치켜세웠다. 집집마다 김장을 하고 나면 처마 밑에 시래기 두름을 걸어 말렸다. 궁핍했던 시절 시래기는 겨울철 양식이었다.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도 나는 시래기된장국이 참 맛있다. 돼지 등뼈에 감자, 우거지, 깻잎, 그리고 시래기를 듬뿍 넣어 팔팔 끓이면 이보다 더 좋은 술안주가 세상에 없다.

찬바람이 거세지면 온 가족이 모여 문짝의 낡은 종이를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르며 또 다른 겨울 준비에 바빴다. 딸이 많은 우리집은 창호지 중간중간에 곱게 말려 둔 코스모스 꽃잎과 네 잎 크로버를 넣어 장식했다. 그리고 창고에 쌀가마니와 연탄 200~300장을 쌓아 두면 어떤 추위가 몰아닥쳐도 걱정이 없었다. 연탄이 유일한 난방 수단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연탄가스에 중독돼 고생했던 일, 연탄 갈 시간을 맞추느라 밤잠을 설쳤던 기억 등 연탄에는 진한 추억이 스며 있다.

기나긴 겨울을 지낼 옷가지, 양식 등을 통틀어 겨우살이라고 한다. ‘겨울살이’라 말하고 쓰는 이들이 있는데 틀린 표현이다. 물론 원래 형태는 ‘겨울+살+이’로 ‘겨울살이’다. 그런데 비슷한 발음의 몇 가지 형태가 쓰일 경우 그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중 하나가 더 널리 쓰이면 한 형태만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표준어규정에 따라 겨우살이만이 표준어로 올랐다.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지니며 가지가 둥근 형태로, 차로 끓였을 때 구수한 맛과 향을 내는 식물도 ‘겨울살이’가 아니라 겨우살이다.

‘한겨울 동안 계속해서’라는 의미의 표현 역시 ‘겨울내’가 아니라 ‘겨우내’가 바르다. 발음을 부드럽게 하다 보니 ‘ㄹ’ 받침이 떨어져 나갔고, 그 말이 널리 쓰여 표준어가 된 것이다. “국화차 덕에 겨우내 가을향을 맡을 수 있었다”처럼 표현해야 한다. 가을내→가으내, 빈털털이→빈털터리, 찰지다→차지다, 길다랗다→기다랗다, 달디달다→다디달다 등의 단어도 같은 이유로 받침이 없는 형태만을 표준어로 삼는다. 따라서 원말대로 받침을 붙여 써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주의해야 할 단어가 있다. 바로 가을살이다. 이는 가을을 지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을철에 입는 옷으로, 봄살이, 여름살이처럼 가을살이가 바른 표현이다.

허풍쟁이 탐험가들의 대화가 한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먼저 북극 탐험가가 말했다. “북극에서는 추위가 얼마나 지독한지 촛불이 얼어서 아무리 불어도 꺼지질 않았지.” 그러자 남극 탐험가가 응수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닐세. 남극에서는 입으로 내뱉는 말이 모두 얼음 조각이 되어서 그걸 프라이팬에 녹이지 않고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더라고.” 겨우살이 준비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한 해의 끝이 보인다. 경기침체 탓에 웃을 일이 별로 없겠지만,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는 법. 희망을 갖고 마지막 남은 달력을 하하 허허 호호 웃음으로 채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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