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다문화 사회와 ‘바나나’의 교훈

입력 2015-05-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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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최근 주말마다 만나는 이가 있다. 한국인 시부모님을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사는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 아잉씨가 주인공이다. 첫째 딸 이름은 트린, 둘째 딸 이름은 예린이라는데, 굳이 베트남식 이름을 붙여준 엄마가 누군지 궁금하여 아잉씨 집 문을 두드렸다. “내 딸이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행여 친구들이 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뒤로 하고, 전트린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다. 트린이는 지금 초등학교 1학년. 친구들이 신기해하긴 하지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하진 않는다 하니 우리네 다문화 포용력도 서서히 성숙해가는 듯싶다.

일찍이 다(多)인종, 다(多)문화 사회의 전통을 뿌리내리기 시작한 미국에서 인종 및 문화 간 공존과 통합의 문제는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1960년대 전 세계를 향해 이민의 문을 활짝 열었던 당시 미국은 스스로를 ‘용광로(melting pot)’에 비유하며 인종과 언어, 혈통과 지역적 차이를 불문하고 누구든 미국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미국 시민으로 동화되리란 청사진을 펼쳤다.

그러나 미국판 용광로의 꿈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고기 스튜(stew)’로 한걸음 물러선 것이다. 곧 세계 각국에서 밀려오는 이민자들이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야채와 소고기를 섞어 뭉근히 끓여낸 소고기 스튜처럼, 각 민족의 역사와 전통 위에 미국 시민이란 맛이 뭉근히 배어든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고기 스튜의 비유 역시 ‘샐러드 바’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야채든 과일이든 각각 고유한 맛을 유지한 상태에서 드레싱만 끼얹는 샐러드처럼, 각 민족들만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뿌리는 유지한 상태에서 미국 시민이란 새로운 정체성을 드레싱처럼 얹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용광로에서 소고기 스튜를 거쳐 샐러드 바에 이르는 비유는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인종과 민족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체성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흥미로운 실례라 하겠다. 인종과 민족 간 이동 및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진정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일면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이를 일컬어 필리핀계 미국인 라셀 파레냐스는 ‘세계화의 하인’에서 결국 자본의 탈민족화와 국가의 재민족화란 맥락 하에 글로벌 이주가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한데 이 역설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주류사회로부터 차별과 수모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사회에 발붙이기 위해서는 한국인도 아니요, 미국인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란 이중(double)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체화해야 한다. 만일 코리안-아메리칸이 백인과 동화되려 한다면 백인들은 가차 없이 ‘바나나’라 칭하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허위의 정체성을 지닌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흑인이 백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한다면 역시 ‘오레오 쿠키’라 부른다 한다. 겉은 검은 색인데 속엔 하얀 크림이 들어 있는 쿠키처럼 가식적 정체성을 지닌 것을 비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결혼이주 여성의 다중적 정체성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고, 그들이 모국(母國)에서 가지고 온 역사와 전통, 언어와 문화를 향해서도 진정성 있는 인정과 포용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했으니 이제 당신도 한국인이라 해놓고선, 피부색이 다르다 하여 차별하고 한국어가 어눌하다 하여 무시한다면 우리네 다문화의 앞날은 암울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 2020년이 되면 결혼이주 가족의 자녀 중 징병 대상자 숫자가 3만여 명에 이를 것이란 추계가 나와 있다. 베트남 며느리의 딸 트린이가 ‘혼혈아’란 낙인을 뛰어넘어 진정 베트남계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미국식 다문화주의로부터 필히 배워야만 할 값진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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