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어김없는 지하철 독서인

입력 2015-03-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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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19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버스간에서(‘버스에서’보다 이 말이 훨씬 좋다) 읽는 책이 어떤 건지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다. 표지를 보지 않아도 ‘이 사람이 읽는 책은 뭐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지하철이 1호선(1974년 개통)밖에 없어 버스가 대중교통수단의 중심이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출판물의 질과 양이 완전히 달라져 베스트셀러가 아니면 뭘 읽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요즘 몇 달째 지하철의 한 독서인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는 나보다 한 정거장 다음에 어김없이 내가 앉아 있는 칸에 들어오고, 어김없이 나와 같은 정거장에 내린다. 묘하게도 어김없이 내 맞은편 좌석에 앉는 그는 갈색 가방을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어김없이 책을 읽는다.

그가 뭘 읽고 있는지 나는 그것이 늘 알고 싶다. 나는 지하철에 앉으면 대체로 책을 읽는 척하다가 어김없이 잔다. 20년쯤 전에 술이 안 깨 광화문에 내리지 않고 김포공항까지 간 적이 있는 실력이다. 좌우간 그렇게 잠이 들기 전에 안경을 끼고 그의 책이 뭔지 멀리서 살펴보는 게 요즘 어김없는 일과 중 하나다.

그는 40여 분 동안 절대로 자지 않는다. 내리기 한두 칸 정도 앞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참 열심히 책을 읽는다. 내릴 무렵이 다 돼서 잠깐 눈을 감는다. 그러다가 “마모나쿠 여의도에키데스”(곧 여의도역입니다)라는 일본어 안내방송이 끝날 무렵 어김없이 눈을 뜨고 어김없이 잘 내린다.

책을 읽는 방법에 우작경탄(牛嚼鯨呑)이라는 게 있다.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독서와 고래처럼 한꺼번에 삼키는 독서 두 가지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눈을 감고 방금 읽은 걸 되새기는 중인데 나는 괜히 내릴 곳을 지나칠까봐 걱정한 것이다.

한 달쯤 전에 그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읽었다. 나도 그 책을 갖고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읽은 책 두 권은 뭔지 모르겠다. 아마도 증권 서적 같은데 내가 워낙 잘 모르는 분야여서 짐작할 수 없었다. 요즘 그가 읽고 있는 건 ‘책은 도끼다’라는 책이다. 검색해 보니 ‘광고인 박웅현의 인문학 강독회’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300여 쪽 중 50쪽 정도 남은 것 같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틀림없이 다른 책을 들고 올 것이다.

나는 유치한 내 독서 수준이 들통날까봐 남들이 표지를 볼 수 없게 한다. 그는 나와 달리 그런 데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멀어서 책 표지가 잘 안 보인다. 어떤 날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 일부러 그의 옆에 다가가 무슨 책인가 훔쳐본 적도 있다.

그가 앞으로도 좋은 책을 어김없이 많이 읽기 바란다. 독서에는 삼여(三餘)가 있다고 했다. 한 해의 여가인 겨울, 하루의 여가인 밤, 그리고 날씨의 여가인 비오는 때가 독서하기에 좋다는 뜻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분인 구양 수는 삼상지학(三上之學)을 이야기했다. 마상(馬上) 침상(寢上) 측상(厠上), 말 위와 침대, 뒷간이 책을 읽거나 생각하기 좋은 배움의 장소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말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앉으나 서나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수그리복’ 속에서 그의 어김없는 독서는 참 장하고 반갑다. 중국 사람들은 고개 숙여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족속을 저두족(低頭族), 고개 숙인 자들이라고 부른다. 중국 발음으로는 ‘디떠우주’인가 보다. fused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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