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미의 예술과 도시] 21. 참전군인 ‘국제추모의 날’ 11월 11일

입력 2024-11-1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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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아트 대표이사ㆍ백남준포럼 대표

나라 위해 스러져 간 무명용사들
‘기억의 불꽃’에 전쟁참사 되새겨

세계 각국 기념일 정해 희생 기려
佛, 개선문 아래 안장 ‘최고 예우’
美 는 ‘재향군인의 날’ 지정해 추모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기자회견 대신에 전한 내용 중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 등 중동 무장세력들과의 분쟁 등 전쟁의 치열함과 매일매일 실려나가는 주검에 대한 상황이 있다.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도 유명한 11월 11일이 프랑스에서는 지정 공휴일이다. 이날이 바로 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이 이뤄진 날이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잔상이 남아 있는 장소들이 많은 프랑스에서는 의미 있는 날이다. 공교롭게도 미국은 이날이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며, 영국은 영령기념일(Remembrance day)이기도 하다. 영령기념일은 영국 연방국과 프랑스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기념하는 날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을 회상하기 위해 제정한 날로, 원래는 휴전기념일(Armistice day)로 알려져 있다.

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한 날

이날은 전쟁 중에 사망한 모든 군인들에게 바쳐진 날이다. 매년 프랑스 전국 곳곳에서 종전을 기념하는 음악행렬과 전쟁 희생자들의 추모식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샤를드골 광장에 위치한 에투알 개선문과 개선문 주변에 글로 써진 알 수 없는 익명의 희생된 병사들을 위해 헌화를 한다. 오전 11시에는 1분 동안 침묵의 시간도 있다.

1920년부터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자리해왔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프랑스인 무명 군인들의 시신을 안치해 역사 전반에 걸쳐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군인들을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장소이다.

굵은 사슬로 연결된 검은색 금속 표지석으로 둘러싸인 이 무덤은 화강암 석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에는 “여기 1914~1918년 조국을 위해 죽은 프랑스 군인들이 잠들다”라는 문구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1923년에는 불꽃이 추가되었는데, 철 세공 조각가 에드가 브란트(Edgar Brandt)와 건축가 가인 앙리 파비에(Henri Favier)가 합작하여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화염이 추가되었다.

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하늘을 향한 대포의 입구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뒤집힌 방패가 조각되어 있으며, 외부 표면은 별을 형상화한 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불꽃은 언론인이자 시인인 가브리엘 보이시(Gabriel Boissy)의 ‘추모의 불꽃’이라는 제안으로 설치된 것인데, 여론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그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앙드레 마지노의 지원으로 빠르게 설치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매일 저녁 6시 30분에 불꽃이 새롭게 켜지는데, 영구적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이다.

승리와 희생의 상징인 전쟁 역사의 장을 살펴보자면, 사실 전쟁이 시작된 해부터 사망군인들을 기리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시행되었지만, 무명 용사들의 묘지에 대한 논의는 다소 부진했던 프랑스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수많은 군인의 희생이 뒤따랐는데, 4년간 벌어진 이 전쟁에서 18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프랑스 측 집계에 따르면 140만 명의 프랑스 군인이 사망했다.

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망자들을 위한 납골당과 대규모 군사 묘지 등 매장지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병사들을 형제들과 함께 쓰러진 곳에 묻어야 할지, 가족에게 돌려보내야 할지에 관한 논쟁은 실종자 명단이 계속 늘어나면서 특히 생존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2019년 11월 11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에 설치된 ‘추모의 불꽃’에 점화하고 있다.  사진출처 Le Point
▲2019년 11월 11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에 설치된 ‘추모의 불꽃’에 점화하고 있다. 사진출처 Le Point
英, 웨스트민스터 선례가 시발점

1916년 11월 26일 프랑스에서는 무명 군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에 대한 아이디어가 프란시스 시몬(Francis Simon)의 제안으로 나왔다. 그가 연설한 렌 공동묘지에서의 내용은 대중적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 프랑스는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죽은 전사들에게 팡테옹의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수많은 영광과 천재들이 잠들어 있는 이 매장지는 상징과 같고, 더욱이 프랑스군 전체에 바치는 헌사입니다!”

1918년 휴전 다음날 전쟁참전 용사 중 한 명이었던 모리스 모노리(Maurice Maunoury)는 법안에서 프란시스 시몬의 아이디어를 법안으로 채택하여 이 논쟁이 프랑스 하원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1920년 내내 계속되었고, 프랑스 정부와 의회는 여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1월 11일 영국군이 웨스트민스터에 신원미상의 군인을 매장하기로 결정을 하자 그것을 모티브 삼아 프랑스 정부도 국가적 헌사를 통해 공화국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군인 추모 프로젝트를 병행하고자 결정했다.

전세계 28국서 무명용사 묘 조성

매장지가 논쟁의 초점으로 부상하면서, 사망한 군인들의 익명성에 대한 부분도 추가 논의됐다. 무명의 용사들은 사실상 위대한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작가도, 과학자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그들을 위한 예외적인 장소에서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의견이 반영됐다. 이들은 훨씬 더 크고 그들이 대표하는 나라를 위한 희생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무명용사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국가적 기원도 일맥상통했을 것이다.

그렇게 1920년 11월 8일 프랑스 하원은 무명용사를 개선문에 매장하는 데 만장일치로 투표한다. 그해 11월 11일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침묵과 눈물 속에서 장례행렬을 따랐고, 수많은 인파들이 삼색기로 덮인 무명용사의 관 뒤를 걸었다. 호송대는 무명용사들의 관을 개선문 내부의 지정공간에 배치했다. 1920년 11월 11일에 무명용사들의 관이 도착했을 때 개선문 하부 무덤은 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1921년 1월 28일에 가서야 그들의 마지막 매장까지 개선문 안에 보관될 수 있었다.

영국의 무명용사의 무덤도 프랑스와 같은 날 런던에서 개관되었다. 무명용사 묘가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총 28개국이다. 전쟁 용사들은 모두 떠났지만 세계대전에 대한 추모와 기억은 지금도 파리 및 각국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이상아트 대표이사·백남준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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