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이냐? / ᄌᆞ목지 호고려(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님 찾아다니노라 / 그 개도 호고려 집의 개인지 / 듣고 잠잠하구나.”
원작으로 추정되는 시조에서는 ‘두목지(미남 시인이자 학자) 호걸(豪傑)님 찾아다니노라’였는데, 이 그릇에서는 ‘ᄌᆞ목지 호고려(胡高麗)님 찾아다니노라’로 바뀌었다. 본래는 사랑을 찾아다니는 애정 시조였는데, 이역만리에 포로로 끌려온 자신의 처지에 맞게 번안한 것이다. 밤중에 조선인 동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개가 짖어 사정을 얘기했더니 잠잠해진 것을 보고 ‘이 개도 조선의 개인가 보다’ 하는 내용이 되었다.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 한글묵서다완(한글墨書茶碗)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 이도다완의 초기 모습이다. 명칭에 들어간 첫 글자인 ‘추(萩)’는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의 하기시[萩市]를 말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을 하기야키[萩燒]라고 하는데, 대개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들과 그 후손의 작품을 일컫는다.
조선인이 만든 이러한 그릇을 일본인들은 말차(잎을 갈아 만든 가루 차)를 마시기에 맞춤해 찻잔으로 애용했고, ‘고려다완(高麗茶椀)’이나 ‘이도다완[井戶茶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井戶(정호)란 가마터가 있던 경남 지방의 지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한자를 풀면 ‘우물’이라는 뜻이다. ‘땅속에 있다가 솟아오른 물’이라는 의미니, 한껏 시적인 이름이 붙었다.
조선인이 만든 흔한 그릇이 일본에서 보물이 된 이유는 16세기의 선승인 센노 리큐[千利休]의 사상과 와비차(侘び茶)의 전통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선불교와 와비차는 한적함과 소박함의 가치를 지향하며 이것이 일본 전통 미학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이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이 그릇은 조선제일까? 일제일까? 조선에서는 개밥그릇에 이르기까지 막 쓰던 그릇을 그들은 보물급으로 취급해왔는데, 그렇더라도 이것이 ‘조선에서부터 시작된 한류의 기원,’ ‘K컬처의 약진’이라고 해도 될까? 때때로 어떤 도자기 작가가 이도다완을 재현했다고 뉴스에 소개되는데, 물리적인 형태는 그렇지만 그것은 이도다완이 아니다. 오랜 세월 사용해 오면서 담긴 정신적 침잠과 문화적 숙성이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그릇일 뿐이다. 이도다완은 도자기 제작 기술에 의해서만 만든 것이 아니다. ‘낳은 정’에 ‘기른 정’이 합쳐진 것이다. 이 그릇은 조선 사람이 만들었지만, 일본의 미학이 투영된 일본의 문화유산에 더 가깝다.
이름은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꽃은 꽃이라고 이름 붙일 때 꽃이 된다. 꽃은 향기와 색깔을 느낄 줄 아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되어준다. 우리는 오래 전의 어느 시절에 ‘막사발’을 만들었고 일본은 수백 년에 걸쳐 ‘이도다완’을 가꾸어왔다. 막사발이 이도다완보다 못한 그릇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굳이 그들처럼 막사발을 보물급으로 취급할 필요도 없다.
일본 수집가의 가족들이 그릇(막사발)에 새겨진 한글의 내력을 알게 된 후, 한·일 양국의 화합을 기원하며 이 찻잔(이도다완)을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불행했던 역사를 되짚는 단서로서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의 화합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