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실종 자리에 정치구호만 난무
정당·유권자 잇는 언론역할 강화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야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여·야 간에 역대급 의석수 격차를 만들어 낸 이번 선거 결과는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은커녕 도리어 표를 깎아 먹은 것도 그렇고, 온갖 불법, 막말, 욕설 등으로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야당이 높은 지지를 받는 상식을 뛰어넘는 결과 역시 원인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는 ‘정당 요인’ ‘후보자 요인’ ‘정책 요인’이 있다. 당연히 정책선호에 따라 투표하는 정책 투표가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정책 투표는 정당이나 후보 간에 정책 입장에서 차이가 있어야 하고, 유권자들도 합리적 판단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정책보다 정당이나 후보자 개인 요인이 선거를 지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번 선거 역시 정책이 실종된 것은 예전과 거의 큰 차이가 없었다. 솔직히 기억나는 정책 공약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굳이 있다면 이재명 대표의 “국민 모두에게 25만 원씩 주겠다”는 것 정도다. 이 역시 정책이라기보다는 그냥 돈 풀어서 표 받아보겠다는 포퓰리즘 성격의 선심성 공약에 가깝다.
대신 이번 선거를 지배한 것은 야당의 ‘검찰독재 타도’와 ‘정권 심판’, 여당의 ‘안정 의석 확보’ ‘범죄 집단 응징’ 같은 정치 구호들이었다. 여·야 모두 현실적인 정책 공약은 없고 그냥 우리 당에 의석을 몰아달라는 읍소 캠페인에만 몰두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안보 환경,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경제 위기와 관련된 어떤 공약도 논쟁도 전혀 없었다.
도리어 선거 중·후반에 터져 나온 야당 일부 후보들의 막말과 욕설, 부동산 투기와 불법 대출 같은 이슈들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실제 선거 결과는 논란이 되었던 후보 대다수가 여유 있게 당선되어, 유권자들의 투표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정당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 직전 급조된, 그것도 각종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거나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들이 주도한 ‘조국혁신당’이 돌풍을 일으킨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효력이 소멸되었다고 생각되었던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이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정당 혹은 후보자 측면과 유권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의 정당들은 여전히 이념과 정책을 축으로 하는 결사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정책을 개발하고 제시하는 능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 정책 공약이 득표에 별 효과가 없다고 인식되어, 공약이 형식적인 퍼포먼스처럼 되어 버린 것도 원인이다.
반면에 유권자들에게 오랜 경험에서 형성된 정책 공약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야 모두 상대방 공약을 모방하면서, 정책 차별성이 거의 없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 유권자들이 정책을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과도한 인지적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도 정책 선거가 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러한 정당 정책과 유권자 간의 간격을 연결하는 장치가 바로 언론 매체다. 선거 기간 중에 정당 또는 후보자 간 정책토론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법정 토론이나 정당 연설은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정보적 가치도 낮고 무엇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정책 선거를 유도하기 위한 토론 프로그램들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 기간 중에 정책 비교나 정책 관련 토론 프로그램들은 거의 실종되어 버렸다. 심지어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가 후진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공적 커뮤니케이션 기구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언론사들부터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