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선생님은 게르니카처럼 답이 뻔히 보이는 문제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외워라’라며 암기과목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외우기만 했던 게르니카는 대학생 때 근현대 세계사를 다룬 책에서 다시 접하고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차츰 그 비극을 이해하게 됐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게르니카로 가는 길은 주변에 산을 낀 왕복 2차로였는데 나란히 이어지는 철길, 조그만 기차역들과 들판, 집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렇게 차로 15분쯤 가자 도시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소박하고 평화로웠다.
이런 마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페인 내전의 승기를 잡고자 했던 반정부 민족주의 세력의 수장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북부를 장악하기 위해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바스크인들의 구심점’ 게르니카를 폭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37년 4월 26일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은 폭격기와 전투기 50여 대를 동원해 40톤의 폭탄을 인구 7000여 명의 작은 도시에 쏟아부었다.
때마침 장날이라 인근 지역의 주민들까지 모여들어 북적이던 게르니카 시내 중심부는 한순간 아비규환의 불바다가 됐다. 3시간 반 동안 수차례 이뤄진 폭격으로 300명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전체 건물의 85%가 완전히 파괴됐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 앞마당에는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거대한 사진들로 만날 수 있다. 또 실내에는 폭격과 화염에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를 강화유리 바닥 아래에 재현해 놨다. 이곳에선 당시의 정세를 알 수 있는 시각물, 거대한 폭탄, 폭격 이후의 사진, 신문 기사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1937년에 제작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거장의 뜻에 따라 1981년에서야 스페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현재는 마드리드의 ‘소피아여왕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게르니카(스페인)=장영환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