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에는 한국인 배우 현리가 출연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그는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며칠 전 데이트한 남자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츠구미 역할을 맡아 비중 있는 시퀀스의 긴 일본어 대사를 매끄럽게 소화해낸다.
현리는 일본으로 이민 간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한국 이름 ‘이현리’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 연기 생활을 하라”는 부모님의 권고 끝에 언어에 능숙한 자신이 “4년 안에 제일 쉽게 졸업할 수 있는 학과”를 고르다가 일본의 한 법대를 택해 진학했다고 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0년대 중반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으면서 고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딱 들으면 한국인이라는 걸 아는 ’이현리’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다녔어요. 숨기는 것 없이 자라왔지만 (다행히) 놀림당한 적도 없고 오히려 이름이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친구가 많았어요. 부모님이 ‘당당하게 살라’고 하셔서 강하게 살았습니다. 요즘은 케이팝, 한국 영화가 모두 잘돼서 (일본에서도) 잘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4일 현리가 능숙한 한국어로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 임했다. 그는 연세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한국에서 연기학원을 다녔고, 2016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단편 ‘천국은 아직 멀어’(2016) 출연을 시작으로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후 감독이 각본을 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2020)에도 출연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은 오디션 없이, 감독에게 직접 제안 받아 출연이 성사됐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자신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지 물었다.
“일본에서 나온 ‘우연과 상상’ 팸플릿을 보니 저를 왜 캐스팅했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더라고요. 대사가 길고 ‘포인트가 되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현리 배우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포인트가 되는 연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질문하자 “저와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의 만남은 영상에 나타나지 않아요. 그걸 다 대사로 설명해야 하는 게 감독님 생각에는 어려웠던 점 아닐까요. 영화는 눈으로 영상을 보는 미디어니까요. 제가 대사로만 연기할 때 관객 머릿속에 장면이 떠오르면 그게 최고일 거예요”라고 답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준수한 언어 감각이 “연기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일본어 사투리 연기, 중국어 연기를 해봤는데 굉장히 빨리 배우는 편이라고 해주셨어요. 잘해서 다행입니다”라며 웃었다.
현리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독특한 연출 방식도 전했다.
“처음에는 줄거리만 있고 대본이 없었어요. 감독님은 배우들과의 만남 첫날에 카드를 몇 장 준비해 오셔서 저와 상대 배우 사이에 놓았고, 그 카드에 쓰여 있는 질문에 본인들의 생각을 답하게 하셨어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뭐 했어요?’같은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었는데, 다음 날에는 같은 질문을 다시 주고받으면서 극 중 역할을 의식하면서 답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배우들의 대답을 보고 대본을 써 오셨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출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은 또 있었다. 배우들이 사전에 연기 연습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서 대본을 외워 오면 안 된다고 하세요. 집에서 뭔가를 준비해오는 걸 정말 싫어하시더라고요. 다 같이 모여서 리딩할 때 감정을 최대한 빼놓고 한 줄 한 줄 외운 다음, 현장에서 그 대사를 심플하게 주고받아요. 그때 어떤 감정이 나타나면 그걸 대사에 심어 달라는 거죠. 저는 다른 작품에서는 준비를 많이 해가는 편이라 이번에는 그런 지점에서 노력해야 했습니다.”
영어 실력을 겸비한 현리는 현재 글로벌 에이전시 이노베이티브 아티스트에 적을 두고 활동 중이다. 코고나다 감독이 연출한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7화에 잠시 출연해 정웅인과 함께 연기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한국 작품 중에서는 김범삼 감독의 ‘카오산 탱고’(2020)에 출연한 바 있다.
현리는 인터뷰 도중 한국 작품에 대한 확실한 애정을 드러냈다.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 데 “거의 30분 정도 소요할 것 같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다”며 ‘D.P.’, ‘소년심판’, ‘빈센조’ 등을 망설임 없이 언급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감독은 “당연 봉준호 감독”이다. “일본 영화계 사람들도 거의 다 좋아하고, 그걸 넘어 존경하는 레벨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김혜수, 이정은 주연의 드라마 ‘내가 죽던 날’(2020)을 연출한 박지완 감독과의 인연도 공개했다. ‘내가 죽던 날’ 일본 개봉 당시 자신이 4년 반 동안 일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는 일본 라디오에 박지완 감독이 출연해 인연이 생겼다고 했다.
현리는 “그때 한국에서는 성범죄 예방을 위해 영화촬영 전 사전 교육을 꼭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일본에서는 넷플릭스 같은 외국 회사가 진출한 뒤 ‘리스펙트 트레이닝’이라는 이름의 교육을 받긴 하지만 아직 (한국 같은 시스템이) 완성돼 있지는 않고 (이제) 하려고 하는 시기”라고 당시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 작품 출연을 계획에 관해서는 “이야기 중인 작품이 있지만 아직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꼭 좋은 작품으로 찾아 뵙겠다”고 다짐했다.
현리가 출연하는 ‘우연과 상상’은 4일 개봉해 현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