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근대 사상을 깨치고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임면수는 나중석, 이하영 등 수원지역 유지들과 힘을 합쳐 삼일남학교와 삼일여학교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09년에는 삼일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 설치 운동을 주도했고, 삼일여학교 건물을 지을 때는 토지를 희사했다. 삼일학교는 1909년 고등과 제1회 졸업생 20명을...
부산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거쳐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1919년에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도쿄의 송영고등여학교, 1927년 교토의 도시샤(同志社)여자전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하고, 이듬해 부산에서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1921년 열여섯 살 무렵 의붓아버지가 죽은 뒤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한다. 여학교 3학년 때인 1923년 기숙사의 지나친 규칙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관련되어 퇴학을 당한다. 같은 해 장연에 문학 강연을 온 양주동(梁柱東)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다. 이듬해 강경애는 상경하여 양주동이 주관하던 금성사에 같이 기거하면서...
189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영준(劉英俊· 1892~?)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여학교 모정서원을 다니면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귀국하여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와 일본적십자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다. 이때 민족사회와 여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지...
1910년 정신여학교를 나와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지내다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가 일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 귀국 후 정신여학교에서 가르치다 1915년 도쿄여자학원에 다시 유학하였다.
1917년 10월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황에스터, 유영준 등과 함께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에 잡혔으나 곧 풀려난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우봉운(禹鳳雲·1889~?)은 정신여학교를 나와 1909년경 대구 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중국의 북간도로 가 1912년 가을부터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하던 명동촌(明東村)의 삼국전도회에 가입하고, 명동여학교 교사로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등 의식계몽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간도애국부인회 회장, 철혈광복단 여자단원 등으로...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공덕귀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물론 피아노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학생회의 회장으로 활동했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학기 말 시험이 끝나면 해운대로 놀러가서 수영을 하고, 레코드를 틀고 ‘체육댄스’를 추기도 했다.
1936년 동래 일신고등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집안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어머니는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교감, 연동교회 최초의 집사, 초대 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김점동)는 신의경의 큰이모,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인 김베세가 작은이모이다.
신의경은 선교사가 세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 학교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1919년 김마리아와...
1913년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졸업한 뒤 전주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며 항일의식과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5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평양에서 여성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신병으로...
졸업 이후 귀국한 그는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김활란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 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미 일본 유학 시절 2·8 항일학생선언에 참여하였고, 결혼 후 만주에서는 어려운 독립운동가를 선뜻 도와줄 만큼 민족애도 있었다.
김일엽과 함께 잡지...
결국 그는 폐병으로 34세에 요절했다.
박에스터의 둘째 언니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 교사, 넷째 동생인 김배세는 세브란스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으로 간호사, 그의 딸인 신의경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가족이 한국 여성의 귀감이 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당시 여성들은 민립 순성여학교를 설립 운영할 협력단체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했다. 19세기말 교육입국론이 주창되면서 정부에서는 관립 남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실행했는데, 관립 여학교는 없었기 때문. 약 400명의 찬양회 회원은 회비를 모아 학교를 운영했지만, 당시 정치사회적 시대상황의 어려움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박 교수는 “교육...
학교에서도 교육 내용에 차별을 두어 여학교에서는 생활관과 가사실습 등 현모양처 교육을 정책적으로 시행했고 어머니날을 제정해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했다. 그 결과 해방둥이 여성들은 “여자가 돈을 벌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거나, 대학에 진학해도 가사과를 선호하였고 직장생활을 했어도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역임한 쟌나 프라따(Gianna Frata)가 지휘를, 2010년 대한민국오페라 대상 연출상을 수상한 장영아 씨가 연출을 맡았다. 음악대학 성악·기악과 재학생 50여 명도 함께 무대에 오른다.
성신여대는 1936년 리숙종 박사의 교육이념과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성신여학교’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50년 전인 1965년에 ‘성신여자사범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1886년에는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1895년 정신여학교와 부산의 일신여학교 등이 세워졌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 여권통문 발표
바로 이 시기인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女權通文)이 발표되었다. 서울의 북촌양반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통문’ 즉 ‘여권통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소사(召史)는...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 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2년 방순희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돼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육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