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숱한 수감·도망 생활에도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89년...
1954년생인 그는 서울대 공과대학 금속공학부를 나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발기인으로 초대 상임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73학번인 그는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대학 시절 두 차례 제적되고 1996년 명예졸업했다.
김근태계 인사로도 분류되는 이 이사장은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2014년 신당 새정치연합을 창당할 당시 참여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당 외부...
1954년생인 이 이사장은 서울대 공과대학 금속공학부를 나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발기인으로 초대 상임위원을 지냈다.
또 민주기업가 회의 회장, 한반도재단 이사 및 운영위원장, 사단법인 일촌공동체 설립자 및 명예회장,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아울러 철도 등 수송용 운송장비 도매업, 독일 호이트그룹 합자 법인인...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학생운동권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해직된 뒤 1979년 10·26 때 일시 복직했다가 1980년 신군부의 탄압으로 다시 해직됐으며, 1984년에 복직했다.
고인은 1985년 신문 칼럼으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키도 했다. 일명 '3김 낚시론'이다. 그는 당시...
군부독재 시절 사회·정치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되며 대학에서 두 차례 해직됐다.
이후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둔 고인은 1991년 강의 도중 강경대 치사사건을 비하하는 언급을 했다가 학생들 반발에 강단을 떠났다.
고(故) 정주영...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1970년 국가 권력을 풍자한 시 '오적'으로 구속되는 필화를 겪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는 등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주목받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까지 선고받았지만 1980년에 석방됐다.
1991년에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면서 진보 진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어 2012년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한 시국강연회에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그해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 씨와 결혼했으며, 1975년 아시아ㆍ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의 시와...
민청학련ㆍ동백림 간첩단ㆍ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고인은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 음모 사건 당시 공범으로 몰려 투옥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과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민변의 전신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제12대 감사원장을 지냈다....
그는 그해 9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박형규 목사의 재심 공판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검찰 비판' 글을 지속해서 올리는 등 검찰 수뇌부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검찰 개혁 검사'로 주목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검찰개혁 코드에 부합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
그는 1972년 유신 선포 후 학생운동에 뛰어든 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부위원장 등 재야 운동권으로 활동했다. 이후 1988년 서울 관악구에서 당시 평화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권에 입문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 회장은 1970년대 긴급조치 1호 때부터 민청학련 사건과 김지하 재판 등 민주화 운동 인사 사건 130여 건을 무료 변론했으며, 이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환경운동연합·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등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현대합동법률 사무소 대표 변호사(1981년), 제37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1993년-1995년),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1993년-2003년)...
서울대 재학 당시에는 학생운동에 몸을 바쳤던 재야 출신으로,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다. 1990년대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 사무국장으로 임명되면서 공직의 첫 발을 뗐다. 참여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바 있다. 넓은 포용력과 함께...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윤보선이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3·1사건 가족대책협의회’ 회장으로 남편의 석방운동을 했다. 1977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공덕귀는 1997년...
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입국이 금지됐던 한 교수가 수십 년이 지나 겨우 한국에 들어왔지만 정부는 여전히 ‘낮의 일’에만 골몰했다며 탄식했다. 반성은커녕 그를 국정원으로, 검찰청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이제는 이름도 생소한 ‘전향서’ 따위를 써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이 마른 것처럼 ‘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은 이번 월요일(10일) 아침...
출소 후에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여간 수배를 피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10년 터울 후배들과 함께 수료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조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출고한 것도 수배 중이었을 때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며 사회적 관심을...
유 의원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으로 1974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전력이 있다.
유 의원은 “과거 사형을 집행했으나 그중 분단국가 및 독재정권하의 이념 대립과 정권유지에 악용돼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아픈 역사가 있다”며 “국제앰네스티에서도 2007년 12월 30일 한국을 세계 134번째 ‘실질적 사형폐지 국가’로...
유신 시절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 받았던 유 의원이 신념에 따라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는 모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정 의원은 “사실 사형제 폐지를 추진하는 건 표가 되지도, 돈이 되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은 표가 되거나 돈이 되는 걸 좇는데 유 의원은 신념을 좇는다”며 “죽음을 눈앞에 뒀다 살아난 분이라 그런지 도인의 풍모가...
◇ 나라 안 역사
‘신바람 건강법’으로 유명한 의사 황수관 사망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김근태 민주당 고문 사망
금호그룹, 워크아웃 발표
LG디스플레이, 세계 최초 480Hz LCD 패널 개발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을 저지른 김용제 등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 집행. 이후 정부가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등 사실상 사형제가 중지됐다
지하철 5호선...
이후 대전지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청주법원장, 인천법원장, 사법연수원장을 거쳐 2012년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김 재판관은 과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64일간 구금생활을 하다 구속 취소로 석방된 경험이 있다. 부인인 정선자 여사도 양심선언문 배포로 인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