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왕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공신인 월(越)나라 재상 범려(范蠡)가 친구 문종(文種)에게 제나라로 같이 떠나자고 편지를 보내 한 말.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춰지고[蜚鳥盡 良弓藏]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입니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해 더불어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할...
같은 시각, 정순덕은 박씨부인으로부터 심정우가 사약을 먹었다며 자결을 강요하자 가슴 쪽으로 은장도를 들었고, 직후 박씨부인의 뜻대로 조씨 문종에서는 임금을 향해 열녀정려비를 내려달라는 상언을 올려 불길함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반면 심정우는 임금의 배려로 미량의 독성분만 들어있는 사약을 먹은 덕분에 열흘 후에 깨어났지만, 정순덕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계조당은 1443년 세종이 왕세자였던 문종을 위해 지은 건물로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경복궁영건일기'등을 바탕으로 6년만에 계조당을 복원 완료했다. 계조당 관람은 경복궁 관람객 누구나 사전 신청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조현호 기자 hyunho@
계조당은 1443년 세종이 왕세자였던 문종을 위해 지은 건물로 1910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경복궁영건일기'등을 바탕으로 6년만에 계조당을 복원 완료했다. 계조당 관람은 경복궁 관람객 누구나 사전 신청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조현호 기자 hyunho@
“상서(尙書) 홍범(洪範)편을 읽으면 기자(箕子)가 세상을 경륜할 만한 재목이었음을 알고, 구술(九術)을 읽으면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이 나라를 일으킨 책략을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민은 서경(書經) 무성(武成)편에 나온다. “오직 바라건대 여러 신들은 나를 도와서 백성들을 구제하고 신의 수치가 될 일은 하지 마소서.”
☆ 시사상식 / 국부펀드...
세종 23년(서기 1441년) 4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아들 문종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 젖어 들어간 정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온 적확한 양을 파악할 수 없어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그릇에 괴인 빗물의 정도를 실험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측우기이다.
조선시대 측우기는 비를 정량적으로...
벽이나 문을 장식할 수 있는 문종(300%), 오르골(100%)이나 벽시계(139%) 등도 각각 2~4배 판매가 신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인 및 소형 가구가 늘면서 가구나 인테리어가 다소 조촐해지는 대신 우아한 샹들리에 등을 통해 자칫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실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화려한 조명 하나로 미니멀한 공간에 색다른...
대부 문종에게 결전태세가 갖추어졌는지 여부를 자문했다. 문종은 시험 삼아 궁실에 불을 질러 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했더니 불을 끄려고 나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종은 “결전 의지를 북돋우려면 상을 두텁게 확실히 내리고 벌을 엄하게 내리면 된다”라고 조언한다. 이에 구천은 “불을 끄다가 죽은 사람은 적과 싸우다 죽은 자와 비슷하게 상을 줄 것이고...
‘고려사’는 1451년(문종 1)에 완성되었고, 그 근거가 되었던 자료들은 고려시대의 자료들이다. 즉 고려시대 내지 조선 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위는 ‘효행’이었다. 그런데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그녀의 행위를 ‘열(烈)’로 보고 있다.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한층...
권씨의 출가에 이어 태종의 후궁들이 집단적으로 출가를 하고, 세종과 문종, 세조, 성종의 후궁들도 내명부에 적을 두고 있음에도 출가를 한 것은 조선 초 왕실 내의 불교 신앙이 매우 깊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송덕봉은 남편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취한 첩과의 소생인 딸 4명을 자신의 딸처럼 잘 다독여 가족 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다. 유희춘은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아내를 당나라 문종 때 효성으로 뛰어난 상곡부인(上谷夫人)과 같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문종실록’에서 사관은 문정왕후에 대해 “천성이 강하고 사나우며 문자를 알았다”고 평했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가 있었다. 그중 두 번째인 장경왕후의 아들이 중종을 이어 즉위했다. 곧 인종으로 불행하게도 8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이어 1545년 명종이 열두 살에 즉위했으니 문정왕후의 아들이다. 당시 조정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불리는 두 외척...
송나라 사람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志)’에는 “고려의 사신 최사훈(崔思訓)이 신종(神宗) 희녕(熙寧) 병진년(1076: 고려 문종 30)에 접는 부채(摺疊扇:접첩선)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 학자 조익(趙翼)도 “접선이 고려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면서 “명나라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에 황제의 명으로 이를 모방하여 만들게 함으로써...
당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두 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범려와 대부(大夫) 문종(文種)이었다. 그런데 본격적 권세를 누려야 할 시점에 범려는 외려 월왕 구천(句踐)에게 작별을 고한다. 구천이 펄쩍 뛰면서, “나와 함께 있으면 나라를 반으로 나눠 줄 것이로되 만일 끝내 떠나고자 한다면 베어버리겠다[孤將與子分國而有之。不然,...
아버지는 문종의 손자인 강릉공(江陵公) 왕온(王溫)으로, 신종이 즉위하기 전 평량공(平凉公)으로 있을 때에 혼인하였다. 신종은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다섯째 아들로, 인종 사후 큰 형인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무신란으로 의종이 폐위되자 셋째 형(명종)이 즉위하였다. 1197년(명종 27)에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즉위시켰다.
즉 선정태후는...
왕연의 아버지는 문종과 인경현비(仁敬賢妃)의 아들인 진한공(辰韓公) 왕유(王愉)이다. 복녕궁주의 아버지 숙종은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아들이니,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의 아들과 사촌 간에 혼인한 셈이다. 이는 고려 왕실의 혼인 관행상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이다. 고려시대에 공주들은 모두 왕실 내에서 배우자를 찾았다. 왕족의 범주를 되도록 확대하지 않고...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王溫)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인주 이씨, 이자연의 딸)의 아들인 조선공 왕도(王燾)의 아들이다. 1143년 태자비로 간택되었으며, 1146년 의종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1149년 맏아들 왕기(王祈)를 낳으니, 혼인한 지 6년 만이었다. 그간 의종은 아들을 몹시 기다렸던 듯하다. 의종의 남동생이 4명이나 되었고, 또 그간 왕위가 동생에게 간 사례도 많았기...
세자 시절 문종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문종은 부인복이 없었다. 문종 자신 때문인지 아버지 세종의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부인을 세 번이나 맞아들여야 했다.
“내 뜻으로는 첩을 아내로 만드는 일은 옛날 사람의 경계한 바인데, 더군다나 우리 조종의 가법에도 이런 예가 없었던 까닭으로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으나…”
1436년 세종이 세 번째...
1077년 무렵에 문종의 셋째 왕자인 왕옹(숙종)과 혼인하여 명복궁주(明福宮主)라고 불렸다. 1083년 문종이 사망하고, 문종의 장자인 순종이 즉위하였다. 다시 3개월 뒤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 선종이 즉위하였다. 1094년 선종이 별세하니 선종의 아들(헌종)이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고, 그 모후인 사숙태후가 섭정하였다.
1095년 남편 왕옹은 쿠데타를 일으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