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낙선재 안마당에 들어서면 궁중무용인 '춘앵무'를 증강현실에서 실제처럼 관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AR스튜디오에서 106대의 4K 카메라로 360도, 초당 최대 60프레임으로 촬영을 해 실제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고화질 입체형상을 생성했다.
특히 희정당이나 후원 내부 등 문화재 보존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구역의 내부를 고화질 360도 VR로 둘러볼 수...
바로 ‘낙선재본 한글 고전소설’이다.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모두 84종 2000여 책이 보관되어 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 조선의 24대 임금으로 문화적인 감수성이 탁월했던 헌종(憲宗, 1827~1849)이 당시 후궁이었던 경빈(慶嬪) 김씨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이 낙선재가 건축되기 전부터 조선 궁중에는 한글로 쓴 소설들이 다수 존재했는데 낙선재가 건축된...
이들은 1963년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귀국, 서울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줄리아는 이곳에서 낯선 궁궐 생활과 종친들의 외면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종친회는 푸른 눈의 이방인 세자빈을 인정하지 않았고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구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줄리아와 이구는 198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귀국 직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2월 28일 ‘이덕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1967년 5월 퇴원하여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수강재(壽康齋)에서 기거하였다. 1989년 4월 21일 78세로 영면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洪裕陵)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1918년생인 꽃뜰은 1939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뒤 음악교사로 10년간 근무하다가 1950년대부터 장서각 낙선재 등의 조선시대 자료를 임서하며 궁체(宮體)를 익혔다. 1954~63년 이화여중고 서예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해 1970~75년 YWCA 서예강사로 활동했다. 1971년부터는 네 살 위인 언니 갈물 이철경(李哲卿1914~1989)에 이어 갈물한글서회(1958년 창립) 회원들을...
'창덕궁 달빛 기행'은 2시간 동안 달빛 아래서 인정전, 낙선재, 부용지, 연경당, 후원 숲길을 산책하고 전통예술과 다과를 즐기는 프로그램입니다. 관람권 가격은 3만 원이며 관람권은 내일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에서 판매됩니다. 만 65세 이상 어르신은 전화로도 예매할 수 있습니다. 한편 외국인은 인터파크 외국인 예매처를 통해 예매가 가능합니다. 달빛...
#고종1910년 한일합방 후 2년 뒤…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고종은 3명의 딸을 잃고 얻은 덕혜를 특별히 아꼈습니다.현재 창덕궁의 낙선재에 유치원을 만들어주기도 했죠.하지만 1919년,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보온병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1925년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당시 덕혜옹주 나이 14세....
이와 비슷한 시기 딸이 유서만 남기고 실종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62년 환국 후 창덕궁 낙선재의 수강재에서 머물며 지병에 시달리다 78세를 일기로 1989년 타계했다.
한편 손예진이 덕혜옹주로 분해 열연을 펼쳐,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영화 '덕혜옹주'는 오는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낙선재(樂善齋), 성정각(誠正閣) 등 곳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장르가 아니니 책 제목처럼 우리 궁궐을 이해하고 알고 싶은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내용의 깊이나 정보 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책은 건물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 낙선재에서 덕혜옹주와 며느리와 지내다 덕혜옹주가 숨진 지 꼭 열흘 만에 영면했다.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자신은 한국 국민이라고 늘 답했던 그녀는 영친왕과 함께 홍릉에 묻혔다. skcho@
1956년 결혼한 딸은 이내 이혼했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덕혜옹주는 광복한 조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귀국을 거부했다. 1962년 귀국했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물기라고는 한 점 없는 박제(剝製)같이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