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항일 비밀결사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평양에서 여성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신병으로 출옥하자 다시 비밀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의 결성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1922년 가출옥한...
시는 독립운동 관련 6대 랜드마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안국역 항일 독립운동 테마역사, 독립운동가 추모전시관 '만인보(滿人譜)의 방' 설치, 삼일대로 일대 '3ㆍ1운동 대표가로', 딜쿠샤 복원. 남산 예장자락 일대 '역사 탐방로' 등을 2019년까지 조성한다.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서대문형무소 바로 옆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들어설 대한민국 임시정부...
덕분에 ‘한국의 콜론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연인들과 동지로 항일 투쟁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비롯하여,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1월에는 주세죽·김조이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운동계에서 맹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8월에는 ‘신여성’ 잡지에...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이어 근우회에 이르기까지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에 심혈을 쏟았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이듬해 7월 임시대회에서 준비위원장으로, 다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조직과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0년 1월 서울지역 여학생 만세운동 사건에 배후 관련자로...
이후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주로 연락을 담당하는 등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참모장으로 활동하던 김학규와 결혼했다.
만주 지역 독립군의 여건이 점차 악화하자, 혁명군 사령부는 임시정부에 원조를 요청해야만 했다. 이때 오광심은 대표로 선발된 남편 김학규와 함께 안동에서 난징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이 책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4.19혁명, 박정희 시대 유신 교육, 5.18광주항쟁, 6월 항쟁부터 학생인권조례, 촛불집회와 참정권 운동까지 현대사 속에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항거해 왔는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묘사한다. 사료에 근거한 사실 외에도 그때 그 시절 청소년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군중 속으로 들어가 사실적으로 묘사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시대상을...
박차정은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일신여학교에 다니던 중 역시 항일운동가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과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3월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를 위해...
24세 때 남편과 함께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2년 만에 남편이 병사하는 참담함을 겪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은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친정으로 돌아온 그는 귀국해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돌봐야 했다. 이미 그는 남자보다 훨씬 나은 단련된 의식과 성격으로 올곧고 투철한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한 많은 대동강의 새벽...
혹독한 감옥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진로를 고민하다 시와 글을 통해 새로운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그는 틈틈이 시를 썼다. 1930년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을 발표하고, 1937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포도’와 ‘절정’ 등을 김광균·신석초 등과 함께 창간한 동인지 ‘자오선’에 선보인다. 그 후로...
그는 기마술 등 선진 전략·전술로 어떤 독립운동가보다 효과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것을 일본 육사에서 배웠다.
유명한 무관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다. 일본 육사에 들어간 것도 군인으로서 더 높은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는...
이미 일본 유학 시절 2·8 항일학생선언에 참여하였고, 결혼 후 만주에서는 어려운 독립운동가를 선뜻 도와줄 만큼 민족애도 있었다.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 발행에 적극 참여하면서 남녀 간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 정조관 등을 주장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 만나 사랑한 최승구가 병사한 뒤 한때 실의에 빠져 방황하였으나 김우영과 1920년에...
1919년 31운동 때 상경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구국에 헌신하기로 작심하였다.
만주 요녕성 통화현으로 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농촌에 10여 개의 교회와 2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청년과 여성들에게 민족애와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1922년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금하고,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그만큼 사회운동항일여성운동에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이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 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가 나면 황소나 호랑이 같아서 네놈들을 잡고 말 것이다”라는 대담한 내용의 글을 띄우고 여성 의병 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집안에만 유폐돼 있던 여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는 ‘안사람 의병가’,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기 위한 ‘방어가’ 등 많은 선동가를 지었다. 윤희순이 당시 여성과 젊은이들의 항일투쟁 의식을 고취한 것은...
이후 중국을 넘나들며 상하이 임시정부의 항일 운동가들을 도왔다.
1920년 김봉규·안국정 등 청년들과 함께 평남 맹산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당시 단원이 수십 명에 달하였으며 맹산·영원·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6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아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의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치안유지...
항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 재야 인권 운동에 헌신했던 죽천(竹泉) 송좌빈 옹이 2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고(故) 송좌빈 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로 'DJ 전도사'로도 이름을 알려왔다.
1967년 DJ가 3선 개헌 반대 시국강연회에서 한 강연에 매료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24년 태어난 송 옹은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과 강제 징집 거부...
무장 독립 운동, 외교 독립 활동, 여성 독립 운동 등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빠짐없이 서술한 것은 물론,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여러 자료와 함께 밝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의 ‘독재’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과,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 운동의 의미와...
글쓴이의 주장은 14번 문항의 정답으로 제시된 1번 ‘국채 보상 운동을 지원하였다’ 외에 5번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논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였다’는 내용도 옳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항일 언론인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최초 게재된 신문은 황성신문이었지만 이후 대한매일신보 지면에도 ‘시일야방성대곡’의 한글과 영문 번역본이...
독립운동 활동 자료 및 사진 등 유품 200여 점이 전시된 매헌기념관에 시스템창, 알루미늄창, PVC 창 등 약 2억 원 상당의 창호자재를 지원해 개보수 공사를 완료하고 재개관했다.
이와 함께 독립유공자 및 유족 복지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광복회를 통해 추천 받아 매년 5세대를 선정, 개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로 일본 동경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 옥고를...
미국에서 이승만 등과 함께 구미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귀국 후에도 청구회 회장으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한다. 독립운동가에서 경찰청장으로, 외무장관, 국무총리에서 야당 지도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정치 이력에서 격변기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어찌됐건 그는 건국 초기 정치적 혼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