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대선에선 다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등장하는 등 7명으로 늘었고, 15대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등 7명이 경쟁했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당선된 16대 대선 역시 후보는 6명에 그쳤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한나라당 이명박...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 후보는 이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예방한 뒤 기자들과 만나 “내가 갤럽은 저번에도 안 믿는다고 했다.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다”며 “갤럽은 아주 낙인찍으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4∼6일 전국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이날 발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박근혜 비서실장에서 배신자로 다시 ‘개혁보수’ 주자로 = KDI를 떠난 유 후보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경제교사로 정계에 입문해 2000년 2월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으로 발탁됐다. 이후 이 총재의 소개로 같은 대구 출신인 당시 박근혜 의원과 알게 돼 2005년 박근혜 당 대표 비서실장이 됐다.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정책담당 총괄단장을 맡았다....
1979년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18년 은둔의 시기’를 보낸 박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대중 앞에 섰다.
1998년 4월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승리하면서 금배지를 달았다. 2004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유 의원은 전날 첫 일정으로 국립 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뒤 본인의 정치 입문을 이끈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예방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표가 순회 경선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본선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다. 문 전 대표는 전날 충청에서 실시된 경선에서 47.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안희정 충남지사는 36.7%를 얻으며 2위에...
딱 20년 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는 9명(이회창·김덕룡·박찬종·이수성·이인제·이한동·이홍구·최병렬·최형우)이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어느 시점부터는 ‘이회창 대세론’으로 기울었지만 말이다.
2012년 대선 때엔 ‘백설공주와 난쟁이들’의 당이었다. 새누리당 간판 아래서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이 독주하자 김문수 당시 경기지사...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7년 15대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당명을 바꿨지만 패배했다. 당 내분과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의 아들 병역 비리 의혹 등 때문이었다.
결국 이번 개명을 통한 ‘당명 정치’는 당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얼마나 쇄신하느냐에 달렸다. 새누리당의 개명이 운명을 바꿀지 결과가 주목된다.
김영삼 정부에서 ‘대쪽총리’라는 별명을 얻은 이회창 전 총리는 여당 후보로 15대 대선에 첫 출전했으나 아들 병역 비리 의혹에 휘청이면서 당시 김대중 후보에게 39만 표 차이(1.53%p)로 석패했다. 이어 16대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에게 57만 표 차이(2.33%p)로 졌고, 17대 대선에선 무소속으로 나서 15.07%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들과 달리 대선 본선레이스를 뛰어보지...
유승민 의원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으로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발탁된 후 4선의 중진 의원이다. 지난 2005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 역할을 10개월 간 맡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원조 친박’이라 불린 바 있다.
특히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의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캠프 핵심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그 당시에는 박 대통령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인연이 닿아 정계에 입문, 2008년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새누리당에서 665일간 대변인을 맡아 당내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이후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 비대위원장일 때부터 당선인 시절까지 대변인을 맡아 ‘신(新)친박’으로 불렸다.
2013년 박근혜 정부 1기 내각에서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앞서 그는 1997년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득표율은 19.2%(492만5591표)였다.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에게 져 본선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2007년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득표율은 0.68%(16만708표)에 그쳤다. 2012년엔...
당시의 대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40%가 넘은 지지율을 얻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였다. 대선 해인 2002년 초반까지도 그의 지지율은 50%까지 치솟으며 청와대행을 확정짓는 듯했다. 하지만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렀던 노무현 후보가 소위 ‘노풍’을 타고 민주당 경선에서 극적인 승부를 연출하면서 대선 판세의 지지율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3월 말 이후에는 두...
실제로 지난 16대 대선에서 양자구도로 맞붙은 이회창·노무현 후보는 57만980표 차이로 희비가 갈렸다. 앞서 15대 대선에서 다자구도로 치러진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도 불과 39만557표 차이로 명암이 갈렸다.
한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32개국이 18세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이인제 전 의원이 대세로 보였던 2002년의 최종 승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한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겨우 1.2%였으나 대역전극을 이루었다. 2012년엔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여론조사별로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안 원장은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후보직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이 전 총재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는 법관 출신의 정치인이다.
1935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난 이회창 전 총재는 1960년 서울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돼 1993년 대법원 대법관으로 퇴직했다.
1993년 2월부터 12월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20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친박계 한 중진 의원은 "당을 비대위로 전환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환골탈태하는 수준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며 당내 인물이 아닌 당 외부 인물에 새누리당의 개혁 작업을 맡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특히 이회창 전...
박근혜 대통령이 이회창 총재시절에 보궐선거로 정치에 입문할 때 최순실과 정윤회가 추천했다는 말이 있다"며 "박 대통령은 그 당시부터 이들에게 포위되고 의지하고 있었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외부에서 전화가 오면 참모들과 정한 것을 바꿨다더라"고 말했다.
또한, 유시민은 "'해리포터'시리즈의 이름을 알지만 누구도 말해선 안되는...
그러나 총리 권한 강화는 곧바로 대통령 권한 약화로 이어질 수 있어 역대 국무총리 가운데 책임총리를 구현한 총리는 김영삼 정부의 이회창 전 총리,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전 총리 등에 불과했다. 다만 지금과 같이 민심 이반이 심각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까지 추락한 상황에서의 신임 총리는 통상적인 수준의 책임총리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지난 2002년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대변인을 맡은 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여성가족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재수 장관은 행정고시 21회 출신으로, 농림수산식품부(현 농식품부)에서 농업정책과장, 농산물유통국장, 주미 대사관 농무관, 기획조정실장 등 농림부 내...
1991년 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첫 여성 변호사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씨티은행 부행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조 내정자는 2002년 이회창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공동대변인을 시작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에 당선됐다. 이어 여성가족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