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무왕은 문명왕후의 소생이다. 만명부인은 신라의 왕을 사위와 손자로 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부인은 김유신과 혼인하여 며느리가 되었다. 멸망당한 가야 왕족의 후예 가문이 신라 왕실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할 정도의 세력가로 부상한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남편의 출세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어쩌면 그 여성은 두 처와는 처지가 달라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남편과 종신토록 함께 살기 위해서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했던 이름도 남기지 못한 한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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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용녀가 왕비가 된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신라가 꾀를 내어 침략하려 했다고 한 것에서, 용녀는 혼인동맹을 통해 가야에 온 신라 출신으로, 신라가 혼인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하면서 문제가 됐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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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장왕을 만나 사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적국인 고구려의 침입을 유도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보면 한씨는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은인이지만,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국의 왕을 사랑해 한강유역을 잃게 만든 매국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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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 형수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식이 친모 외에 아버지의 다른 부인과도 혼인할 수 있었다. 호동이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고 원비가 참소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취수혼을 하는 고구려에서 원비와 호동이 남녀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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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재 중 한국전쟁이 나자 구호품을 마련해 보내기도 했다. 1952년 귀국해서는 전쟁 중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고아들을 위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 이들에게 기술교육을 했다. 1971년 8월 24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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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다. 허영숙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다 지병으로 숨진 전 남편 이광수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였다. 그 외 별다른 활동 없이 살아가다 1975년 77세의 나이에, 화려했지만 한도 많았을 세상을 등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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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안부 박물관에 대해선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말고 전쟁과 여성 폭력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메카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면서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기 내에 위안부 박물관과 여성사 박물관 설립을 임무로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가부가 예산이 적은 미니부처인데다 낮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여가부...
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돌아오지 않고 월북했다. 그 후 1956년 조선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1958년 이후 행적이 끊겼다. 숙청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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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학교는 식민지 당국의 압력 속에 무궁화를 상징하던 ‘근화’라는 이름과 결별, 1938년 10월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결국 1940년 8월 교장 직위에서 물러나 교육 일선에서 손을 떼었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학교를 지키다 1955년 6월 1일 7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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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에 기반한 현모양처, 그것은 천역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부인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 후 이일정이란 세 글자가 다시 신문지상에 나타난 것은 1935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이다. 5월 13일 딸 종숙의 집에서 숙환인 심장병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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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 치고 그녀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녀의 소식은 해방 되던 해 동생 윤창한(尹昌漢)에게 보내온 서찰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끝까지 고향 산천을 등지게 하였는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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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17세에 첫째 딸 희정을 낳고, 20세에 둘째 딸을 낳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둘째 딸을 낳을 때까지 한 번도 시댁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신랑이 장인 집에 들어와 사는 입장가(入丈家) 시절이라 이런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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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비가 사망하자 이문건은 장인(匠人)을 시켜 춘비의 관을 짜서 노비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장사지냈다. 방실은 춘비가 죽은 지 사칠일(四七日)이 되던 10월 6일 죽은 아내를 위해 무당을 불러 정성껏 굿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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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아버지 신수근의 관작(官爵)도 회복되었다. 복위가 결정된 후 시호를 단경(端敬)이라 하였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능호는 온릉(溫陵)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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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봉은 남편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취한 첩과의 소생인 딸 4명을 자신의 딸처럼 잘 다독여 가족 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다. 유희춘은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아내를 당나라 문종 때 효성으로 뛰어난 상곡부인(上谷夫人)과 같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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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효종은 옹주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귀인 조씨만 자결하게 했다. 조 소용을 폐위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총애했던 사실을 감안하여 자진(自盡)케 하고 작호를 폐하지 않은 채 1품 귀인에 맞게 예장(禮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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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모가 기이하고 언어가 비범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은 진짜 왕자(王子)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란 혐의로 1375년 처형되었다. 은천옹주의 사례는 고려시대 여성의 경제활동뿐 아니라 국력을 키워 원과 저항하려 했던 고려 왕실의 대응과 거기에 일조했던 여성의 활동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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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의 자식들을 볼 때 당시 명문가와 원 황실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순비는 1335년 사망하였는데, 그녀의 삶은 고려시대 귀족 가문의 연혼(連婚), 고려와 원의 통혼, 여성의 재혼 등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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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인은 남편 홍규가 1316년 사망한 뒤 혼자 20여 년을 살다 82세가 되던 1339년에 사망하였다. 그 사이 남편의 측실(姬媵)이 따르고, 무리들이 복종하였다는 데서 그녀가 너그러움으로 집안을 잘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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