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아버지 신수근의 관작(官爵)도 회복되었다. 복위가 결정된 후 시호를 단경(端敬)이라 하였다.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능호는 온릉(溫陵)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송덕봉은 남편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취한 첩과의 소생인 딸 4명을 자신의 딸처럼 잘 다독여 가족 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다. 유희춘은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아내를 당나라 문종 때 효성으로 뛰어난 상곡부인(上谷夫人)과 같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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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효종은 옹주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귀인 조씨만 자결하게 했다. 조 소용을 폐위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총애했던 사실을 감안하여 자진(自盡)케 하고 작호를 폐하지 않은 채 1품 귀인에 맞게 예장(禮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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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모가 기이하고 언어가 비범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은 진짜 왕자(王子)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란 혐의로 1375년 처형되었다. 은천옹주의 사례는 고려시대 여성의 경제활동뿐 아니라 국력을 키워 원과 저항하려 했던 고려 왕실의 대응과 거기에 일조했던 여성의 활동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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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의 자식들을 볼 때 당시 명문가와 원 황실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순비는 1335년 사망하였는데, 그녀의 삶은 고려시대 귀족 가문의 연혼(連婚), 고려와 원의 통혼, 여성의 재혼 등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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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인은 남편 홍규가 1316년 사망한 뒤 혼자 20여 년을 살다 82세가 되던 1339년에 사망하였다. 그 사이 남편의 측실(姬媵)이 따르고, 무리들이 복종하였다는 데서 그녀가 너그러움으로 집안을 잘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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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없어 그녀의 종교적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길은 없지만, 적어도 대사라는 벼슬을 내려줄 만큼 그녀의 불교적인 행적이 볼 만한 것이 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진혜대사는 고려시대 불교에서의 여성의 위상과 한계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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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집정에게 농락당하던 왕실의 수호가 의(義)라는 생각 역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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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사회에서 혼인은 일반적으로 16세 전후로 이루어졌는데, 문의왕후는 혼인 당시의 나이가 20세로 늦은 편이었고, 용모도 동생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문의왕후를 통해 신라 하대에 변화한 왕실 여성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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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꿈’은 이 설화를 소재로 쓴 소설이다.
진골 귀족인 김흔의 딸은 조신에게 성불(成佛)만큼이나 까마득한 꿈이었다. 조신은 꿈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꿈에서 깨고 난 후에는 영원 같은 사랑이 순간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속(俗)은 성(聖) 앞에서 부질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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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회에서 계집종인 욱면이 성불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일까. 욱면으로 인해 부처님이 사는 이상 세계, 불국토(佛國土)에 가려는 꿈을 누구나 꿀 수 있게 되었다. 욱면의 성불은 신라 사람들에게 꿈을 꿀 수 있게 하였고,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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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광덕의 처가 관음보살이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응신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광덕의 처가 있었기에 광덕과 엄장의 성불이 가능했던 점을 기리는 말로 여겨진다. 이처럼 신라인은 성불한 광덕과 엄장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한 광덕의 처 역시 주인공으로서 기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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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가 낳은 아들은 왕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벽화는 날이군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왕에게 바쳐진 공물이었다. 그러나 왕이 벽화를 받아들인 것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개인적인 감정이었다. 벽화는 공적인 이해와 사적인 감정의 교차 지점에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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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의 소수자로서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조용한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교회의 성차별과 편견을 깨뜨리고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설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전밀라 목사는 1985년 10월 30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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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장사를 해 번 돈으로 노동운동가를 돌보았고, 수배자를 숨겨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6년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등을 지냈다. 2011년 9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은 큰아들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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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애상적인 목소리로 조선인의 아픔을 위로했고, ‘저고리 시스터즈’ 활동을 통해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레뷰쇼를 선보였으며, ‘김시스터즈’를 미국 무대에 진출시켜 대중음악 기획자로서도 성공한 이난영은, 그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1965년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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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한국 방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오엽주는 근대적 위생 관념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투철한 여성으로서 미용사라는 직업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패션 감각과 미용기술이 뛰어나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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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는 나운규를 좋게 평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숙청당해 안주의 협동농장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 뒤 1980년대에 복권되었고, 1982년에는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삼천만의 연인’, ‘친일배우’, ‘인민배우’ 등 극적인 삶을 오간 문예봉은 1999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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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에 대해 증언했다. 그 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7년 12월 평생 모은 약 2000만 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한 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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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에 ‘한국의 어머니’로 재탄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임당은 조선사회 최초로 당대 재능으로 명성을 떨친 여성이다. 따라서 사임당에게 덧씌운 이미지를 걷어내고 진면목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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