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밀라는 선교사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교장은 ‘전도부인’으로 통했던 전밀라에게 여자도 목사가 될 수 있으니 신학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1931년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아버지가 교회의 장로로 있는 원주로 가서 전도부인으로 일했다. 지역의 교회를 다니며 여선교회 조직과 전도사업을 했다.
그 뒤 일본 도쿄(東京)...
역대 수상자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연세대학교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 김대중 전 대통령,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등이 수상했다. 국내 재계 인사 중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상을 받았다.
코리아 소사이어티측은 최 회장이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으로서 해외 유학 장학사업을 진행하면서 국가 인재 양성은 물론 한미...
이탈리아 선교사들에 의해 1582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세워졌으나 1835년 태풍과 함께 발생한 화재로 정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소실돼 지금은 일부 모습만 남아 있는 상태다.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의 조화를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성당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곳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 없다면 마카오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하기...
그런데, 100여 년 전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낸 사람은 누구일까요?그는 뜻밖에도 외국인, 게다가 식물학자가 아닌 프랑스 출신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바로 에밀 타케(Emile Taquet), 한국명 엄택기 신부입니다.타케 신부는 1898년 1월 한국 땅을 밟아 1952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을 제2의 조국 삼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는데요. 주로 남쪽 지방으로 선교를 다닌...
어린 최경자가 가장 선망했던 대상은 외국 선교사와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선배 여성들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선교사와 뾰족구두를 신은 여학생에 매료되어 자신도 ‘신여성’이 되고 싶었다.
1927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는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도쿄 국립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 사범과에 입학해 피아노를 배우다가...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공덕귀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물론 피아노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학생회의 회장으로 활동했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학기 말 시험이 끝나면 해운대로 놀러가서 수영을 하고, 레코드를 틀고 ‘체육댄스’를 추기도 했다.
1936년 동래 일신고등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한 뒤 ‘공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을 모의했다. 3·1운동 때 기전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고, 극심한 물고문과 폭력을 당했다.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뒤...
신의경은 선교사가 세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 학교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1919년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동료의 밀고로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검거되었고,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출옥 다음 해인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창설에 참여해 서기로 일했다....
10대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가 세운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1917년 졸업하고 마산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과 연결되어 마산 시위를 벌이다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순천댁’이라는 별칭을 사용한 뒤부터 ‘박순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해 가을 기녀로...
어머니가 난산으로 숨지기 직전이었는데, 캐나다 여성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Hall)의 진료로 그를 낳았으며, 이후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5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비밀독립운동단체 송죽회(松竹會) 평양지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졸업 후 유치원 보모로 있다가 1918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여자영학숙(女子英學塾)을 거쳐...
캐나다 국적 의료 선교사인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일제의 폭압적 통치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는 한국에 있던 외국인 중 유일하게 3.1 만세운동 계획을 미리 통보받고 비밀리에 지원해 '민족대표 34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일제가 벌인 제암리·수촌리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
숭실대학교는 미국 선교사 베어드(W.M.Baird) 박사에 의해 1897년 10월 평양에서 문을 연 한국 최초의 기독교 민족대학이다.
취임예배에는 김삼환 법인이사장(명성교회 원로목사), 박종순 증경 법인이사장, 김대근 제12대 총장, 한헌수 제13대 총장, 심영복 총동문회장, 황선욱 교수협의회장, 이석원 노동조합 지부장, 이서호 총학생회장, 조성기 목사(숭목회장), 영락교회...
캐나다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을 맡았던 그는 1983년 귀국 후에도 함석헌(1901. 3.13~1989. 2.4) 등과 ‘재야원로간담회’에 참여했으며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지난해 김재준 목사에 대한 제명·파면을 철회했다.
또한 결혼생활에 대한 행복한 마음을 종종 공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공개된 사진 속 선예는 여전한 미모를 뽐내는 모습이다. 화려한 무대 의상은 아니지만 수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선예는 지난 2013년 1월 캐나다 교포 선교사 제임스 박과 약 2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슬하에 두 자녀를 양육 중이다.
이후 아프리카 선교를 지원, 2001년부터 남수단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으로 꼽히는 톤즈에서 움막 진료실을 짓고 환자를 돌봤다. 톤즈의 유일한 의사였던 이 신부는 현지에서 ‘쫄리(John Le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2008년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2010년 1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수단의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신부의 일대기는...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의 서양 선교사들처럼 아프리카 지역의 전문가를 키워, 태양광 발전소의 지분을 증여하고, 월급을 1000만 원씩 주는 것이다.
둘째, 한국의 산과 들에서 나는 전통 음식으로 우주 식량을 개발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우주 식량은 우주인들도 안 먹으려 하는 화학물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만 먹으면 하루 종일...
본명은 김점동으로 선교사 스크랜튼의 일을 돕던 아버지의 권유로 1887년 이화학당에 입학, 졸업 후 세례를 받고 에스터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치료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병원 일을 하던 그는, 언청이를 수술해 예쁜 얼굴을 찾아준 의사를 보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을 가려면 남편이 필요했던 그는 여의사 홀의 소개로...
그 밖에 다른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기념관 내부에 있던 중요 전시품은 대부분 밖으로 꺼낸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가 난 연세대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연세대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선교사 일가가 살던 연희동 사택을 복원·개조해 만든 건물이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선교활동에 헌신했다며 눈물지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현지 한인들도 있었다.
한 현지 선교자는 "그쪽 나라는 조금 서운하면 목사 뒤통수도 돌멩이로 찍어서 죽이기도 하요. 말 그대로 목숨 내놓고 선교 하는 곳이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교회 밖의 박목사와 교회 안의 박목사가 전혀 달랐다고 했다. 그들이 충격적인...
60대 한국인 목사의 파렴치한 성범죄가 네티즌을 분노케 하고 있다.
21일 한 언론은 “캄보디아의 유명 관광지 시엠립에서 가난한 현지 소녀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60대 한국인 목사가 전날 체포됐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고 전했다.
박모 목사는 지난 6년 동안 최소 8명의 소녀나 어린 여성을 자신이 운영하는 교회에서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