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한달] 집단 트라우마 '진행형'

입력 2014-05-1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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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을 향하던 전동차가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멈춰 섰다.

조명이 꺼진 객차 내에 "안전한 열차 안에서 기다려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승객들은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앞다퉈 비상문을 열고 선로로 뛰어내렸다.

세월호 참사의 악몽이 생생한데 안내방송만 믿고 마냥 기다리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15일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됐지만 대형 재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 어처구니 없는 사회 시스템을 확인한 시민은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불신감을 넘어선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사회 분위기가 침체되면서 소비 심리도 위축돼 '내수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고 이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학교와 다중 운집 시설, 교통수단 등에 대한 일제 안전 점검과 대피 훈련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후약방문이라는 쓴소리도 나온다.

◇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분노·허탈

세월호 사고 당시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0여명의 승객들을 저버린 선장과 선원들의 파렴치한 행태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사고 직후 객실에 전달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은 세월호 희생자 추모 집회의 피켓으로 옮겨져 위기 대응력에 한계를 드러낸 정부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을 상징하는 문구가 됐다.

특히 해운사와 관리 감독을 맡은 정부 기관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돼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이 새삼 확인되면서 '나도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높아지고 있다.

박주희 바른사회시민회의 사회실장은 "이번 참사로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안전관리 및 위기대응 능력 부재, 괴담 선동, 저급한 정치까지 모두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세월호 사고 이후 총체적인 안전점검에 들어갔지만 이를 비웃듯 지하철 사고가 속출했고 다 지은 건물이 기울고 철거를 앞둔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등 어이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애타게 기다리던 생존자 구조 소식은 들리지 않고 매일 바닷물만 비추는 똑같은 TV 화면을 바라봐야만 했던 시민들은 무기력증을 호소하고 있다.

직장인 조정현(41)씨는 "요즘은 뉴스나 신문 보는 것도 괴롭다.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로 알고 있는데 국가가 과연 국민을 지켜줄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 소비심리 급격 위축…내수 시장 '바닥권'

사회 분위기가 얼어붙으면서 소비 심리도 위축돼 내수는 바닥을 치고 있다.

정부와 공기업, 대기업은 공식 행사를 줄줄이 취소하고 단체 회식도 사실상 금지했다.

개인택시 기사 최모(61)씨는 "요즘은 공무원뿐 아니라 대기업도 회식을 하지 않아 심야 손님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며 "생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손님이 없지만 세월호 참사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서초구 잠원동에서 한정식 집을 하는 김모(53)씨는 "저녁 손님이 기껏해야 한 테이블 밖에 없다"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 흥미를 잃고 멍하게 지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첫 주말에는 용인 에버랜드와 과천 서울랜드 등의 출입객 수가 평소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달 초 황금연휴에도 불구하고 통신, 제약, 유통, 식음료 등 주요 내수기업 86곳 중 절반인 45곳의 2·4분기 영업이익 전망치가 한 달 전보다 하락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봉천동에 거주하는 주부 이현정(40)씨는 "요즘에는 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영화를 보러 가도 괜히 신경이 쓰여 외식도 잘하지 않게 됐다"며 "TV 뉴스를 보다 보면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 학교·대형건물 피난 훈련… "사후약방문 아니었으면…"

세월호 사고 이후 대형 재난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학교와 대형 건물 등지에서 대규모 피난 훈련이 벌어지고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아니냐는 씁쓸한 시선을 받고 있다.

전국 시·도 교육청과 대학들은 교육부의 지침을 받고 내달 9일까지 각 학교 기숙사 소방 안전점검과 입주 학생 화재 대피 훈련을 시행하고 있다.

13일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 트레이드타워와 아셈타워에서 사상 처음으로 입주사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피훈련이 벌어졌다.

삼성그룹이 14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등지에서 대피 훈련을 했고 다른 대기업 사옥에서도 안전 점검 및 대피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그래 왔듯이 대형 재난이 터지고 나면 사후약방문식으로 대피 훈련을 하는 모양새만 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직장인 김세형(37) 씨는 "1년 뒤에도 이런 안전 훈련이 계속 시행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대형 사고가 난 직후 보여주기식 훈련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정기적인 대피 훈련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규제하는 식으로 제도화해야 할 것 같다"고 주문했다.

여객선 대형 참사를 경험했기 때문인지 여객선이 안전 문제를 우려해 회항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사소한 고장이라도 행여나 사고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지만 이 역시 만시지탄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10일에는 인천에서 덕적도로 가던 여객선이 출항한 지 30분 만에 회항하기도 했다.

선사 측은 '엔진에서 이상한 소음이 난다'는 기관장의 보고에 따라 안전 점검을 벌여 엔진을 수리하고 나서 여객선 운항을 재개했다.

곳곳에 만연한 안전 위협 요소들을 시민들이 나서 감시하고 직접 해결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종교계와 학계, 시민단체 인사들은 14일 '생명안전고발센터'를 열고 활동에 들어갔다.

이 단체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불행한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원칙이 있는 생명한국'을 목표로 활동할 것"이라며 앞으로 각종 위험 시설 등에 대한 제보를 받아 시정을 요구하고, 개선되지 않으면 관계 당국에 고발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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