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제조업의 두뇌를 깨우자 -정재훈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입력 2014-02-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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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ARM(암)은 디지털 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술 기업이다. 이 업체는 반도체를 직접 만들어내는 생산라인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디지털 기기 제조회사를 상대로 반도체칩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재산(IP) 이용권(라이선스)을 판매하고 소비자 제품에 들어가는 칩 한 개당 일정 비율의 로열티를 받는다.

세계 어느 시장에도 ‘ARM’이라는 상표가 직접 붙어있는 제품은 없다. 하지만, ARM의 제품은 어디에나 있다. 세계 300개 회사가 ARM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설계한 반도체칩을 이용해 만든 부품을 자사 제품에 탑재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디지털TV를 비롯한 가전제품, 스마트카 분야까지 섭렵한 ARM의 존재는 모바일 CPU 시장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지난 1990년 단 12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영국의 한 작은 벤처기업이 20여년 만에 종업원수 2700명, 1조2000억원가량의 연 매출을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저력은 무엇일까. 바로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연구개발(R&D) 인력이다. 디지털 기기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기기 구동에 반드시 필요한 두뇌(반도체)를 제대로 설계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설계하는 고급 인력과 소프트웨어 인재들. 이것이야말로 ARM이 대규모 하드웨어 생산시설 없이도 살아남은 비결이다.

ARM은 창조경제 실현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눈여겨 봐야 할 성공 사례다. 특히 시스템반도체 설계,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디자인, 엔지니어링 산업처럼 지적재산으로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분야들은 대규모 시설 투자 없이도 창의적 아이디어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중소기업들이 주의 깊게 벤치마킹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녹록지만은 않다. 제품에 부가가치를 더하는 기획·설계 분야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에는 아직 기업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국내 업체인 실리콘웍스를 예로 들어보자. ARM과 비슷한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이지만 매출 규모(2013년 약 4500억원)나 전문인력 수(394명)를 비교해 볼 때 ARM과 비교가 안된다.

대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사 규모 2조4000억원,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다리 등 수많은 기록을 낳은 인천대교 건설에서 국내 대기업이 담당한 것은 시공뿐이었다. 공정관리, 구조설계 등 주요 영역은 영국과 일본기업이 차지했다. 국내 기업들이 시공처럼 저수익·고리스크 영역에서는 비교적 강세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획 설계·개념 설계 분야는 선진국에 뒤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인식한 정부도 최근 ‘제조업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 업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시스템온칩(SoC), 엔지니어링,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디자인 등 기획 설계를 통해 완제품의 부가가치를 더해주는 기업을 이른바 ‘두뇌 전문기업’으로 지정하고, 오는 2018년까지 총 300개 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선정된 두뇌 전문기업에 인력, 기술, 자금 등을 패키지 형태로 지원할 계획이다. 우선 엔지니어링 개발 연구센터를 통해 매년 1500여명의 고급인력을 양성하고 전문기업으로의 취업을 지원한다. 또한 두뇌 전문기업을 위한 전용 R&D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전용 펀드를 조성해 기술금융을 활성화한다. 아이디어를 지적재산으로 관리해 기업들의 지재권 대응도 지원할 예정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이달 초 두뇌 전문기업 선정 사업 공고를 내고 두뇌 업종 육성을 위한 소중한 첫 발을 내디뎠다.

기술의 융합 트렌드가 가속화될수록 앞서 언급한 두뇌 업종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두뇌 업종은 고급 인력의 역량이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창조경제형 기업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영세형·소규모 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맷집을 기대하기 어렵다. 두뇌 전문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순수 벤처기업인들의 열정과 시너지를 발휘하여 몇 년 후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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