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이 문제는 남 일이 아니다. 스트리밍 정액제를 이용해 본 적은 없지만, 스트리밍 서비스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내 노래도 CD 보다는 음원을 통해 접하는 사람들이 몇 배 더 많을 것이고 그들 중 대부분이 다운로드보다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던 나의 음원 수입도 갈수록 더 줄어들 것이다. 음악인들이 이 문제를 생존권 문제로 칭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소비자들의 탓을 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음반을 사 주거나 곡당 600원을 내고 음원을 다운로드 받아준다면야 고맙겠지만, 더 싸고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쪽으로 간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음악생산자연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들을 때 한 곡당 음악생산자에게 돌아오는 금액은 1.3원 이하이다. 1원짜리 동전도 없는 시대에 말이다. 그래서 아이돌은 해외시장으로 진출하고 나 같은 인디뮤지션들은 ‘알바’를 한다.
한편으로 이 정액제 논의를 지켜보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 또한 느낀다. 테이프를 사 모으기 시작해 CD를 거쳐 온 세대인 나는 말 그대로 음악을 ‘열심히’ 들었다. 음악전문잡지에서 리뷰를 읽고 추천 밴드의 앨범을 사보고 친구들과 CD를 돌려들으며 좋아하는 밴드를 찾고 그들의 음악을 수백 번이고 플레이했다. 앨범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점유 과정이었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내 애정의 증명방식이자 음악을 좋아하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요즘에는 음악을 훨씬 더 쉽게, 그리고 많이 접한다. 핸드폰 벨소리를 좋아하는 음악으로 해서 듣고 SNS에서 좋아하는 음악의 동영상을 링크시키고 스마트폰으로 음원사이트에서 음악을 듣는다. mp3 파일조차 필요 없다. ‘재생 목록’만 있으면 된다. 이제 음악은 그 자체로 소유하고 몰입하는 것이기보다는 타인과 나를 맺어주는 매개체이거나 일상의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음악이 우리 생활 곳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은 음악을 공기처럼 당연히 주어지는 것, 혹은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은연중에 착각하기도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할 때가 있다. 음악은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창작자, 연주자, 녹음/믹싱/마스터링 기술자, 제작자의 고민과 노동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산물인데 그걸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서운한 거다. ‘stop dumping music’을 외치면서 함께 광화문을 행진하던 동료 음악인들도 그런 마음 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