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낡은 녹음기속의 아버지

입력 2012-06-2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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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SK에너지 선임기술감독

늦둥이의 옹알이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는 주저 없이 고가의 녹음기를 구입했다. 거기엔 제 옹알이 소리도 있고, 형제들 싸우는 소리, 회포를 푸는 듯한 할머니의 넋두리, 실수로 덮어쓴 팝송 한 자락 같은 가족의 소소한 일상이 죄 담겨 있다. 힘들게 챙겨온 녹음기를 자랑스레 조립했다. 묵묵히 40여 년을 버텨준 진공관 녹음기.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조차 아깝고 아련할 정도로 깊고 애틋한 세월의 흔적이다. 오로지 가족의 추억을 남기려는 마음으로 아버지는 69년 당시 3만원이었던 아카이 진공관 녹음기를 장만했다. 요즘에야 녹음기가 흔하지만 당시엔 아버지 월급을 몇 달씩 모아야만 겨우 살 수 있는 귀한 것이였다. 녹음된 테이프나 사진에서 살아생전 아버지의 육성과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아버지에게는 그저 가족의 소박한 일상이 행복이었고, 고된 일상의 가장 안락한 빛이 되어드린 것 같다. 늦둥이의 옹알이를 ‘소리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마음에 아버지는 기꺼이 고가의 녹음기를 구입했다. 거기엔 ‘아기’ 인 나의 옹알이 소리, 형제들 싸우는 소리, 회포를 푸는 듯한 할머니의 넋두리, 실수로 덮어쓴 팝송 한 자락 등 가족의 소소한 일상이 죄 담겨 있다. 정작 아버지의 목소리는 ‘자, 이제 말해봐’ 정도가 전부. 4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 것일까? 녹음기는 이제 누구의 추억도 기록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장난 녹음기를 통해 40여 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곤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거울이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가족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며 추억을 정리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아버지와 똑 닮았다. 하지만 당장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에게는 무척 소중한 추억인데 정작 아이들은 기억조차 못했다. 어린 시절 제가 그랬듯 추억의 소중함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저도 아버지처럼 아이들이 진심으로 추억을 그리워하고 그 추억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을 때 보여주고 싶다. 인생은 사는 것보다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다. 낡고 고장난 녹음기가 아버지의 인생, 그리고 아들의 인생을 고스란히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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