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cine 해부학] "영화 '가비' 꽤 괜찮은 영화이긴 한데…"

입력 2012-03-15 09:28 수정 2012-03-1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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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70년대 충무로는 문예영화의 중흥기였다. 문학적 또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들이 연이어 스크린에 옮겨지며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일까.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충무로에 또 다시 이런 분위기가 타오르고 있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소설이 앞 다퉈 영화화 되고 있는 것.

개봉을 앞둔 영화 ‘가비’도 분위기에 휩쓸린 작품 중 하나일까. 원작 소설의 구성 대비 영화의 완성작을 놓고 보자면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만하다.

앞선 언급대로 작가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가 이번 영화의 밑그림이다. 소설은 조선시대 말 아관파천 시기 고종과 조선인 여인 ‘따냐’ 그리고 이반이란 남자의 관계를 그린다. 엄밀히 말하면 따냐의 인생역정에 따른 스토리가 간략히 묘사된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황금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가비’가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 ‘가비’란 ‘커피’의 한자식 표현.

여기서 ‘간략히’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책 자체가 상당히 얇다. 때문에 스토리 구성상의 축약과 압축이 많다. 조선에서 러시아 청나라 다시 조선으로 이어지는 따냐의 대장정이 단 몇 줄로 설명되거나, 인물 간 감정의 긁힘이 다소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영화 ‘가비’는 이런 부분을 십분 활용했다. 원작의 여백을 빽빽한 밑 글씨로 채워 넣은 것이다. 때문에 원작 대비 인물간의 관계도가 좀 더 촘촘해 진 느낌이다. 나아가 19세기 말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채 풍전등화의 신세로 하루하루를 연명한 조선의 비극적 운명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원작 속 따냐와 이반은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아니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들에겐 애초에 나라의 개념은 필요치 않은 듯 보인다. 고종에게 전달될 러시아 황제의 선물을 강탈하거나,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조정을 상대로 한 탕을 꿈꾸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영화에선 방향을 틀었다. 고종 암살을 위한 가비 작전에 휘말려 든 따냐와 일리치(원작 속 이반)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선의 운명을 아파한다. 고종의 전담 바리스타로 투입된 따냐는 고종을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균열이 생기며 자신의 역할에 갈등을 느낀다. 일리치 역시 마찬가지다. 권총을 품고 고종이 지내는 러시아 공사관을 잠입할 정도로 대담한 그다. 하지만 그 대담함은 따냐에 대한 연정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종에게 권총을 겨눈 채 따냐의 마음을 흔들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모습은 연인을 잃고 싶지 않은 한 남자의 순정만은 아닌 모습이었다.

힘의 논리 앞에 스스로 약함을 괴로워하는 고종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 감정의 동요까지 숨어 있는 듯하다. 원작에 없는 사다코에게 휘둘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일리치의 모습이 고종의 내면과 겹쳐지면서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단편적으로나마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다코를 조선인으로 설정한 것, 언제 독살될지 모를 위협 속에 살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장면은 강함과 약함의 이분법적 구분이 갖는 모순을 원작 속 축약과 압축의 방식으로 풀어낸 표현 방식의 느낌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조선인 사다코의 계략에 휘말린 따냐와 일리치가 각각 고종과 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전쟁의 맨 앞에서 느낀 감정의 파도가 스토리의 맥이다. 그 안에 고종과 따냐, 일리치와 사다코, 그리고 네 사람의 사각관계가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꽤 괜찮은 원작의 변주를 시도했음에도 네 인물의 관계도에 집착한 나머지 전반적인 밑그림 자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산으로 간다. 초반과 중반의 인물도가 꽤 괜찮은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이후의 사각 관계는 사건의 빠른 진행 속에 묻혀 이음새가 뚝뚝 끊긴다. 때론 끊어진 이음새가 붙을 만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가위질을 한다. 결말부 덕수궁 정관헌(조선 최초의 커피숍) 장면은 걷도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연기는 충분함을 넘어선다. 15년 만의 스크린 복귀를 자축하듯 김소연은 절제의 미학으로 따냐의 복합적인 내면을 그린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서 묻어나는 쓸쓸함은 커피의 씁쓸함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주진모의 마초 캐릭터와 유선의 악역도 볼거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배우는 박희순이다. 불안과 슬픔, 설움, 분노가 새하얀 곤룡포를 입은 모습과 더해져 시대의 얼굴을 대변한다.

‘접속’ ‘텔미 썸딩’ ‘황진이’를 연출한 장윤현 감독 연출.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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