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지도자의 말

입력 2010-11-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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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장 겸 증권부장

▲부국장 겸 증권부장
김훈이 쓴 소설《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그러나 당초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였다. 첫 문장을 쓴 김훈은 담배 한 갑을 태우며 고심한 끝에“은”을“이”로 바꿨다.

김훈은 4년 만에 출간한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이고‘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입니다.”

김훈이 토씨 하나에 집착(?)한 것은 말 한마디, 단어 하나하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훈은“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데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 시킨다”고 역설(力說)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말과 언어 때문에 혼란스럽다. 큰 사건이 터진 후 국민들에게 던진 지도자의 말이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연평도를 도발한 직후 “단호하지만 확전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여기서 애써 간접화법을 쓴 건 이 발언이 문제되자 청와대가 뒤늦게 이 대통령의 직접 언급이 아니라고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발언의 진위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 언급이 북한 도발 직후 정부가 취한 스탠스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호하지만 확전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역설(逆說)적인 표현에 가깝다. 겉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음미해보면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게 역설이다. 한용운 시인이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라고 읊은 게 역설이고,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기독교 메시지가 역설이다.

역설은 모순이 진리로 승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차원적인 논리이고 그만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역설을 아무나, 아무렇게 사용하면 궤변으로 전락해 버린다.예수만큼 역설적인 표현을 많이 한 인물도 없을 텐데,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화자(話者)인 예수의 삶과 말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역설적인 표현에 저항감을 갖는 건 그것이 궤변은 아닐지라도 그 말속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복되는‘말의 기술’에서 공허함과 식상함을 느끼고, 심지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실제 어떤가.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에 정부는 마이크만 잡으면 ‘단호한 응징’을 되뇌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한 술 더 떴다. 도발 직후에는 ‘확전 금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더니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단호한 대응’ ‘몇 배 응징’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지난 29일 특별담화에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응방안은 나오지 않은 채 또 다시 유사한‘언어의 프레임’을 반복하자 국민들은 또다시 실망했다.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는 용기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온다”“북 도발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라고 나름대로 결의의 찬 모습을 보였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다.

정치는 말이다. 지도자는 말을 잘해야 한다. 그렇다고 달변가가 돼 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지도자의 말은 상황 판단을 잘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읽어 시의적절하게 해야 한다. 심지어 즉흥적으로 보이는 말 일지라도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는 자신의 한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국민들의 마음을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상황에도 불구하고 부하가 잡아 온 청어 개수까지 기록했고, 여자 친구와 헤어진 부하의 마음까지 다독거렸다. 그가 사소한 것 까지 신경쓰며 부하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마도 말(명령)의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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