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꼼짝할 수 없는 덫에 빠져 들었다.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글로벌 환율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제1책무이자 당면 현안은‘물가안정’이다. 한은 역시 물가 안정을 위해 설립됐다. 이는 한국은행법에도 명시돼 있다. 따라서 한은의 통화정책이 추구하는 최우선 목표는 무엇보다도 물가를 안정시키는 일이 돼야 한다.
하지만 물가 불안에 따른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반복적 메세지에도 불구하고 한은의 연이은 금리 동결로 결국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게하고 있다. 특히 최근 G20 의장국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탓에 정부가 외환정책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찾지 못 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 김 총재가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중앙은행의 역할이 더욱 중차 대해질 것”이라며“시장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중앙은행이 의사 결정의 독립성과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했던 말과 대치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정부의 압력으로 지난해 말 올렸어야 할 금리를 올리지 못한데다 김 총재는 취임 후 경제상황이 나빠질 게 예상되는데도 금리 인상 신호를 계속 보냈다”며“시기와 독립성을 놓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한은의 이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 하락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한은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환율 하락이 가속화될 것을 우려해 금리를 동결한 것으로 보인다”면서“하지만 환율 하락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4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9.8원 하락한 1110.9원에 마감됐다. 금리 동결도 환율 하락세를 막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한은의 통화정책이 이미 큰 실기를 했다는 지적이 대두되고 있다. 물가를 잡기위한 선제 대응의 중요성은 제쳐놓은채 대내외 불확실성, 환율 불안 등 여러 구실에 더 비중을 둬 통화정책을 결정한다면 금리 인상의 타이밍을 어떻게 맞출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난 9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올렸어야 했다는 얘기다.
한편 연내 금리 인상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다음달 초 양적 완화책을 발표할 게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인상카드는 쉽게 내놓기 어렵고 통상 12월에 금리를 올리는 일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내 인상이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