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한국은 기초의학 기반 강화를 위한 조직과 전략이 없었다.”
31일 왕규창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의학한림원) 원장은 한국 기초의학 위기의 원인을 이같이 진단했다. 국내 기초의학 기반 강화를 위한 의료계 내외부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이날 의학한림원은 서울 강남구 고려대학교의료원 고영캠퍼스에서 기초의과학 포럼을 열고 기초의학 강화에 무심했던 의료계 내부의 자성과 함께 정부의 장기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기초의학은 인체 구조와 기능을 조사해 치료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진료나 의술 등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기술 자체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기초의학 연구 결과는 의료행위의 근거가 된다. 최선의 의료를 위해서는 기초의학 발전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셈이다.
국내 의료계에서 열악한 기초의학 연구 환경은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아 왔다. 의료계와 정부 모두 관심을 두지 않아 양질의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에 의학한림원은 의학연구기반강화 특별위원회를 두고, 의학계 의견을 수렴하고 기초의학 연구 기반 강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왕규창 의학한림원장은 “과학기술 패권 시대에 의학을 포함한 과학기술 주도권은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확보에 달려있다”라며 “한국은 단기간 내 임상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들었지만, 기초의학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초의학은 장기간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장 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한계로 소외돼고 위축됐다”라고 분석했다.
왕 원장은 의학자들의 협력 부족도 지적했다. 그는 “한동안 기초의학자들이 임상의학을 ‘낮은 수준의 의학’이라고 폄훼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이 협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라며 “임상의학자들은 기초의학자와 협력하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비의학 기초과학과 협업하게 됐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정부의 의학연구에 대한 지원도 충분치 않아, 기초의학의 존립을 우려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국연구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정부가 지원한 이공계 연구비 가운데 의·약학 분야의 비중은 21.7%로, 공학(46.6%)의 절반에 못 미쳤다. 왕 원장은 “부처마다 분절적인 지원이 시행됐고, 부처의 힘겨루기 마당이 됐다”라며 “미국, 영국, 일본이 부처의 경계를 허물고 대규모 의학 연구를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는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한국판 아르파헬스(ARPA-H) 등을 마련해 기초의학의 고사를 막기에 나섰다. 왕 원장은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라면서도 “과연 앞으로 안정적인 사업으로 지속되고, 선진국처럼 의학연구체계가 발전할지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의학계의 내부 반성이 필요하다는 쓴소리도 나왔다. 그간 의학계에는 연구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조직도, 전략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정부출연연구원인 ‘한국한의학연구원’을 설립해 한의학계의 기초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기초의학을 위한 정부 연구기관은 별도로 두지 않았다. 이에 대해 왕 원장은 “한의학계에서는 꾸준히 노력하는 이들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없었던 결과의 차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의료계의 연구기반 강화 전략이 효과적인 사례로 제시됐다. 미국 의료계는 미국의사협회(AMA)와 미국의과대학협회(AAMC) 등 두 단체가 이끌고 있다. AMA가 진료와 치료 등 실질적인 의료서비스에 집중하고, AAMC는 교육과 연구를 강화하며 학문과 기술적 역량을 모두 확보했다.
한희철 의학한림원 부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의학연구가 발전해야 최상의 진료를 담보할 수 있는데, 학술의학은 누군가 지속해서 관심을 두고 옹호하지 않으면 사그라들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라며 “미국 AAMC는 교육과 연구와 진료가 어우러져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학연구의 사령탑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미국은 국립보건원(NIH)이 보건의료 분야 연구개발(R&D)를 총괄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 NIH에 착안해 문부과학성, 후생노동성, 경제산업성 등 3개 부처에 흩어져 있던 R&D 예산을 모아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를 조직했다. 하지만 한국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산발적으로 보건의료 분야 R&D 사업을 벌여, 비슷한 사업이 중첩되며 일정한 방향성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 부원장은 “4개 부처에 분산된 연구비를 모아 한국형 K-NIH를 설립해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 의료계도 스스로 변화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