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

입력 2024-10-0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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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희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

“청각장애인이 개발자에 들어 있나요?”

학습 어려움을 겪는 아동을 위한 교육 앱 기업인 에누마 이수인 대표가 탄자니아 청각장애 아동을 위한 ‘수어 모드’기능 펀딩을 받기 위해 한 경연에 나가 최종 발표를 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던진 질문이다. 이 대표는 발표장에 나가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참가기업들은 수어로 발표를 준비했고 심사위원장은 청각장애인이었다. 에누마가 만든 프로토타입 앱의 품질은 흠잡을 데 없었고 앱 개발에 청각장애인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말했지만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결국 펀딩에서 탈락했다.

이 대표는 최근 발간한 책인 ‘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에서 이 경험을 소개하며 청각장애인 권리의 역사를 되짚는다.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타인이 대신 표현하는 것을 강제당한 역사가 있다. 1895년 농인 부모, 배우자, 학교 교사 등이 국제회의에서 ‘무조건 구화(입모양으로 소통하는 것)를 배워야 하며 수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결정한 역사가 있다. 농인들은 수어를 사용하면 체벌을 받기도 했다. 비장애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훈련을 강요받았다. 이후 민권이 확대되고 당사자들의 긴 투쟁을 통해 비로소 수어는 ‘독립적 언어’로서 인정받았다.

이 사례를 읽으며 한국에서 가끔 장애관련 앱이나 서비스를 응모하는 경진대회에서 심사했던 경험이 생각났다. 장애인들의 니즈를 해결하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장애 당사자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금 극단적으로는 소비자의 필요를 해결하는 게 개발 목적이 아닌 ‘내가 원하는 기술이나 기능을 선보이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기술이 중심이 되는’ 앱들은 경진대회에서 당장은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 유지하지 못해 사라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생각 때문에 무의에서는 반드시 장애당사자가 참여해 사회 변화를 제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었다. 올해 무의가 처음 선보인 프로그램은 ‘소셜디자이너’였다. 서울 성수동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팀을 이루어 지역의 장애접근성 문제를 해결한다는 ‘성수소셜디자이너’를 모집하기 시작했을 때 약간의 걱정이 있었다. 과연 청년 장애인들이 많이 와줄까? 기우였다. 팀별로 장애 당사자들이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역할을 잘 해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장애 관점으로 제시한 아이디어가 결국 모두에게 긍정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 줬다. “길이 패어 휠체어로 가기 힘든 인도 상황을 안전신문고라는 앱을 통해 신고했는데, 길 사진을 찍으니 어떤 위치인지 모르겠다며 신고앱에서 처리하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다면 ‘판단이 가능하도록 주변 지형지물을 찍어서 올리라’는 기능을 앱에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장애인뿐 아니라 도로나 인도 상황을 신고하는 비장애 시민과 민원을 처리하는 공무원에게도 유용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에저튼은 “사용 중심의 역사는 세계를 움직이는 역사를 낳는 반면, 혁신 중심의 역사는 말로는 보편적이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소수에만 기반을 둔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보편적 기술이나 서비스를 기획하는 기업이라면 장애당사자를 비롯해 다양한 고객을 개발 초부터 감안하고 참여시켜야 한다. 이수인 대표는 자신의 뼈아픈 경험과 함께 청각장애인들의 구호를 소개했다.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다. 첨단 기술이 도드라지는 제품이나 서비스일수록 혁신 과시가 목적이 되거나 기술 자체가 주인공이 아닌,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필요가 주인공이 되는 개발 방식이 폭넓게 도입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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