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을 보면서 파리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미국 여성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의 4년 전 모습이 생각났다. 시몬 바일스는 올림픽에서 미국 체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4년 전 도쿄 올림픽에서 “공중에 멈춰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foreign)”며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위해 경기 한 종목에서 기권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복귀해 평균대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바일스의 행동은 예전 같으면 “국가대표가 정신력이 이렇게 해이해서야!”라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일스는 다른 핑계를 대는 대신, 체조선수가 공중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 떨어지는 심리상태를 솔직히 밝혔다. 국가 대표선수라는 압박감에도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냈고, 체조코치에게 오랫동안 성적 착취를 당했던 과거가 있다. 그런 바일스에게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더 절박한 의미였을 것이다.
바일스의 사례는 흑인 운동선수들이 겪는 이중차별, 여성의 경우 삼중적 압박을 겪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운동 경기에서 여성 선수를 향한 성차별은 그동안 많이 알려진 바다. 바일스를 비롯한 미국 여성 체조선수들은 대표팀 소속 의사에 의해 무려 18년간 성희롱, 성폭행을 당했다.
여성 선수들의 외모 평가는 일상이다. 예를 들어 프로 테니스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조차도 외모를 지적받은 일이 있다. 1999년 경기에서 흑인들이 즐겨하는 비즈가 달린 머리장식을 하고 출전했다가 이를 심판이 지적했던 것. 심판은 ‘천 같은게 경기장에 날리면 안 된다’는 내부 규정을 들었는데 이 규정은 경기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천조각을 날리면 안 된다는 것이라 심판의 지적은 다분히 차별적 요소가 있었다.
세레나 윌리엄스도 여성 선수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하퍼스 바자에 글을 쓴 적이 있다. 흑인 여성 선수로 겪은 갖가지 수모, ‘별별 욕’, ‘잠자코 있어라’는 무언의 압박을 떠올렸다. 여성 선수가 적극적으로 항의하면 (남자 선수들은 겪지 않았을) 감점이나 징계 등이 가해지는 현실도 지적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흑인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에서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는 압박 외에도 이런 추가적인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하나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Black fear). 즉 흑인 선수를 견제하고 두려워하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은 잘하겠지(Black excellence)라며 흑인 사회가 흑인 선수에게 거는 기대다. 이런 압박감 사이에서 시몬 바일즈가 메달 대신 ‘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말한 것은 아마 다른 선수들에게도 비슷한 상황에서 포기할 용기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다문화 배경 선수나 외국에서 귀화한 선수 등 다양한 배경의 선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게는 뿌리깊은 차별이 장애물이 된다. 태극마크를 달면 더 큰 사회적 압박이 작용하기도 한다. 안세영의 폭로는 선수 개인의 건강이 망가지는 상황을 감내할 정도까지 메달 압박감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던졌다.
쿠베르탱 남작이 말한 올림픽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다. 심신을 향상시키는 게 올림픽 정신의 맨 앞에 나와 있다. 선수들이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메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에 일조하는 것이 관중으로서의 우리들이 지킬 수 있는 올림픽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