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

입력 2023-06-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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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멀리하던 책 좀 읽자고 만든 모임에서 별 뜻 없는 질문이 화두에 올랐다.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면 잘 될까.’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듯했지만, 저마다 의견은 있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반복 학습은 생각보다 강하다.” “가르치는 사람은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할까.”

그날 읽은 건 박완서의 책이었다.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끝맺음 한다.

제 딸의 몸을 미군에 팔아 입에 풀칠하려던 어머니, 결혼을 세 번 해도 그저 징그럽기만 한 삶. 과거를 잊기 위해 몸부림쳐 온 주인공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허영심’이었다. 결국 ‘있는 척’ 연기하다 스스로 마주한 이중성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깨닫는 게 50년 전 출간된 책 내용이다.

지금은 부끄러움을 몰라야 하는 시대가 온 듯하다. 검찰청과 법원에 오가다 보면 부끄러움이 나름의 미덕이었던 시절은 확실히 지나갔음을 느낀다. 힘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라”며 상대방의 이중성을 폭로할 때마다, 등 뒤에서 욕설과 응원의 함성이 동시에 들려온다.

서울중앙지검에 두 차례 ‘셀프출석’한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검찰이 ‘고양이 앞에 쥐 같다’고 했다. “김건희 여사는 소환은커녕 서면 질문도 못하고 있다”라면서다. 수많은 지지자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서며 ‘무고한 사람 그만 괴롭히라’고 적힌 팻말도 들었다. 녹취록과 진술로 특정된 ‘돈봉투 의혹’ 연루자들의 수사는 건너뛰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원칙대로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말도 설득력이 없긴 마찬가지다. 송 전 대표의 말처럼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수사는 3년째 진행 중이다. '대장동 50억 클럽’ 수사마저 미적대는 와중에, 야당을 향한 수사는 빠르고 거침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이길 도리가 없다는데, 여기저기 승리한 사람들의 고성만 난무하고 있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겨도 인기가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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