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의 길 위에서 사람들이 몰려 넘어지고 눌려서 숨을 쉴 수 없어 159명이 사망한 사고를 두고서 관료들은 하나같이 매뉴얼 탓을 했다. “주최 측 없는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행사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거나 “주최 측이 없으면 경찰은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라고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은 이렇게 판단했다. “지금 여기 사람들 인파가 너무 많아서 지금 대형사고 나기 일보 직전이에요, 다 밀려 가지고요. 여기 와서 통제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라고.
지시적 규제, 로벤스보고서로 탈바꿈
안전선진국인 영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강행규정을 최소화하여 대부분의 안전보건 조치방법을 사업주가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강행규정조차도 ‘절대 의무’, ‘실현 가능 의무’,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 의무’의 3단계로 나누어 유연성을 부여한다.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의무의 경우 위험과 통제조치 간에 비용, 시간, 노력 등을 비교하여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이행하면 된다. 사업장의 사정이나 기술력, 비용 등에 상관없이 무조건 지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때 영국도 대표적인 지시적 규제 국가였다. 여러 법에 흩어진 규제는 세세하고 강력했다. 강력한 규제에도 끊이지 않는 대형재해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고, 영국 정부는 1970년 각 분야 대표 6인으로 위원회를 꾸려 개선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산업안전의 규제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로벤스보고서가 고용부를 거쳐 의회에 제출됐다.
보고서는 그 핵심철학인 규제의 유연화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산업안전보건 규제방식에서 강제와 자율의 균형이 결여돼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1차적인 책임은 위험을 생산하는 자와 노동자에게 있다.” “현재의 접근법은 마치 사람들에게 일터 안전보건이 주로 외부 기관의 세세한 규정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을 감시하려는 시도는, 마땅히 관심을 쏟아야 할 더 심각한 문제에 덜 주목하게 한다.”
중대재해 감축,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영국 정부와 의회는 보고서를 토대로 2년의 논의 끝에 1974년 사업주에게 목표는 부여하되 구체적인 조치방법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목표기반 규제로 바꾸는 혁신을 단행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사망률이 10분의 1 이하로 줄어 안전일등국이 되었고 세계적인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은 지시적 규제방식의 전형이다. 사업주가 지켜야 할 사항을 1200개가 넘는 조항으로 일일이 정하고 있다. 규제가 경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하다. 사업주는 규제에 눌려 새로운 기술과 사업장 특성에 맞는 보다 효율적인 안전보건 조치를 모색하기 어렵다. 엄동설한에 감기가 걱정되어도 장갑은 낄 수 있지만 정작 추위를 막는 데 더 효과적인 점퍼는 입을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규제방식의 폐해는 수치로 나타난다.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2022년 유족급여 승인 기준 사고사망자는 874명으로 전년 대비 46명이 증가했고, 사고사망만인율은 0.43퍼밀리어드로 동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으로 안전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대폭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이다.
다행히 작년 11월 정부가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기존의 경직된 규제로는 산재를 줄이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위험성 평가를 통한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가기로 한 것이다. 로드맵의 법제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산업안전보건 법령정비추진반’도 발족했다. 로벤스보고서는 법으로 만들어지고 이행되어서 비로소 생명력이 생겼다. 이 보고서가 노사로부터 뿐만 아니라 야당으로부터도 환영받을 만큼 설득력을 갖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법령정비추진반이 과연 어떤 ‘보고서’를 만들어낼지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