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도입부 중 일부다. ‘너무 늦겠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흰 토끼를 보고, 호기심이 불타오른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무작정 굴 안으로 뛰어드는 장면이다.
최근 심리학 저널 ‘Current Opinion in Psychology’ 48호에 음모론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연구를 진행한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의 로비 서튼(Robbie Sutton) 심리학 교수와 그의 동료 카렌 더글라스(Karen Douglas)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음모론(conspiracy theory)을 믿게 되는 과정이 앨리스가 토끼 굴에 빠지는 것과 유사하다. 일례를 들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지구는 사실 접시처럼 납작하다’와 같이 누군가 정설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주장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하지만, 몇몇 사람은 이를 믿는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문 또는 이런저런 책에서 부합하는 내용만을 채택해 증거로 모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이 논리적이고 확실한 근거를 기반으로 사실을 도출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의 교류는 늘고,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의견 교환은 점점 줄어든다. 음모론을 믿는 이들 사이에 소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결속력이 증대된다. 이런 유대감 때문에 생각을 되돌리는 게 점점 어려워지면서 결국 자신을 진리 추구자로 여기게 된다. 이처럼 음모론을 믿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점점 깊고 빠르게 그 안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속고 있는 대중과는 달리 자신은 일의 전모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모론은 정치, 사회 사건에 관한 게 대부분(?)이지만, 과학 관련 내용도 심심치 않게 많다. 앞서 말한 지구 평면설, 인류는 달에 간 적이 없다는 내용의 아폴로 11호 달 탐사 음모론, 지구 온난화 허구설,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백신 관련 음모설은 그 내용이 제법 알려진 것들이다. 이 중 가장 최악은 ‘지구 온난화 허구설’이다.
기후위기 자체를 ‘사기극’이라며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지구가 더워지는 건 맞지만 탄소 배출과 같은 인간 활동에 기인한 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즉, 지구 역사상 기후는 항상 변해왔고 현재의 지구 온난화는 약 1500년 주기로 나타나는 자연적인 기후 현상이라는 논리다. 이에 대한 역사적 증거로 중세 온난기를 들었다. 중세 온난기엔 지난 세기보다 스무 배나 더 더웠고, 기온 상승 현상은 주기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될 것이니 호들갑 떨 필요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고생대 기후(Palaeoclimate)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중세(900~1400년) 온난기의 기온이 최절정에 도달했을 때도 현재의 기온보다 결코 높은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중세 온난기는 유럽 지역에 한정된 현상이었고, 이어진 소빙하기(Little Ice Age)에도 지구 전 지역에서 동시에 기온 강하가 발생한 건 아니라고 한다. 이 외에도 지구 온난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연구 결과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음모론 맹신자들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되돌아 나오도록 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서튼과 더글라스의 주장에 의하면 ‘관련이 없는 사실들을 교묘하게 엮어 사실인 양’ 하는 음모론에 빠지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적 능력과는 무관하다. 이런 일을 완전히 방지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과 정중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기를 독려한다면 잘못된 생각에 매몰되는 걸 멈출 수는 있다고 한다. 그들을 조롱하고 자꾸 구석으로 몰아가기보다는 사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